귀여운 어린이들의 서툰 실수는 귀엽기 마련이다. ‘어이구 괜찮아 괜찮아. 다음번에 잘하면 되지 우쭈쭈’라 말하며 세상 다정한 표정으로 어린이를 진정시킨다. 하지만 이런 귀여움은 어른이 되어서도 같을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귀여운 어른(?)이란 약점이 되기 쉽다. 직장에서의 서툰 실수는 모두의 이빨을 꽉 깨물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 무서운 점은 입은 웃고 있으나 꽉 깨문 이빨 사이로 분노가 새어 나온다. 보이지 않는 분노의 열기로 온몸이 땀으로 범벅 되고 차가운 눈초리에 손발이 덜덜 떨린다. 어른이의 세계에서는 눈빛으로도 매를 맞는다. ‘00가 실수를 했구나~’에서 ‘00 씨.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하면 어떡합니까’로 대화의 분위기는 다정함에서 숨 막히는 싸늘함으로 바뀌어 버렸고, 귀여웠던 어린이는 눈칫밥 먹는 가여운 어른이가 되어버렸다.
서툼은 익숙하지 않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너도 나도 바쁜 사회에서는 익숙해질 틈도 주지 않는다.
서툰 자신의 모습이 본인도 싫은데 거기다 대고 고나리질을 해대는 상사 덕에 자존감까지 바닥으로 내던지게 만든다. 처음부터 완성형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상사들도 올챙이 적 시절이 있을 텐데 흑역사에 발작 버튼이 눌린 건지 새로 들어온 올챙이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격이다.
적당한 잔소리는 어느 정도의 자극제가 될 수 있지만 숨 쉬듯 내뱉는 잔소리는 소음 공해가 되기 마련이다. 소음 공해는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얼마 없던 가능성, 의욕마저 짓밟아버린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잔소리마저 익숙해지면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다정한 말 한마디, 칭찬 한마디는 언제나 귀에 걸리게 되어있다. 귀에 앉은 딱지가 떨어져 나가고 새살이 돋게 만든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동공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고래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칭찬을 아주 좋아한다.
칭찬이 무겁디 무거운 고래의 몸을 일으킬 정도면 전날부터 출근의 압박으로 몸져누워있는 인간의 몸도 단번에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서툰 어른이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칭찬 한마디는 고카페인 음료보다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최고의 피로회복제이다. 그러니 올챙이 적 본인의 귀여움을 떠올리며 비록 외양은 귀엽진 않더라도 다정한 말로 쓰다듬어 주는 것이 어떨까.
사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연인, 친구 등 인간관계에서도 서툼은 늘 보인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이 시절처럼 서툴기는 매 한 가지이다. 세상에 사람은 수십 억 명, 각자의 유전자는 다르고 서로 살아온 환경까지 다르므로 그러한 조건들이 합쳐지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번 새로운 상황에 맞딱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관계를 시작함에 있어서도 그렇듯 처음은 서툴고 익숙하지 않다. 직장과는 다르게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덜 하지만 그럼에도 완벽하게 해내려는 강박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직장에서는 상사의 눈초리가,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눈빛에 어린 실망감이 안 그래도 처진 어깨를 더욱 구부정하게 만든다.
어른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착착해내는 마법사가 아니다. 모두가 처음 사는 인생이기에 매 순간이 서툼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노력하는 모습이, 애쓰는 모습이 귀엽지 않은가.
축구와 제육볶음 밖에 모르는 남자가 관심 있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연남동 브런치 맛집을 찾는 모습, 외양은 프렌치 시크 파리지엥인 외국인들이 지하철 티켓을 뽑기 위해 기계와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 신문물이 익숙지 않아 키오스크 앞에서 한참 동안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여 보는 어르신들, 모두가 몸은 커버린 어른이지만 서툰 모습들은 어린아이처럼 귀엽다.
그런 그들을 찬찬히 지켜보다 다정한 듯 무심하게 칭찬 한마디 놓고 가면 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줘야 하는 어린이와는 다르게 어른이는 착착 알아서 해낼 것이기 때문에.
고나리질 사절! 칭찬은 어른이도 춤추게 한다! 이것이 서툰 어른이 사용법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