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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개굴 Aug 18. 2023

저 서울사람 맞거든요?

*이 글은 소량(?)의 촌스러움을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나는 대전에서 약 30년을 살았다.

하지만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서울'이라고 꿋꿋하게 대답한다.

거짓말은 아니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상봉동에 위치한 모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동대문구 이문동에서도 아주 잠시나마 살았다.

주민번호 지역 코드도 서울인 '0'으로 시작한다.

아무리 그래도 서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건 오렌지 농축액이 고작 0.00001% 함유된 오렌지 주스를 진짜 오렌지 주스라고 우기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난 정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 서울 사람 맞거든요?"




붉은색 벽돌, 방방 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비릿한 쇠냄새가 나던 빌라.


나에게 유년 시절의 가장 강력한 기억은 서울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중계동 뒷골목'이다.

엄마를 비롯한 외가 식구들은 외삼촌만 빼고 모두 서울에 올라와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엄마도 서울에서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

엄마와 아빠가 결혼 전 내 이름을 지었다는 '네오'라는 카페가 있는 회기역이나

스무 살의 엄마가 난생처음 피자를 먹었다는 명동의 레스토랑,

화이트 데이에 엄마에게 고백하기 위해 사탕이 박힌 꽃다발을 든 젊은 시절 아빠가 서있던 청량리역을

상상하면 언제나 가슴 언저리가 뻐근했다.


우리 가족만 장남인 아빠 탓에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왔다.

그래도 이모들이 모두 서울에 있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곧잘 서울에 갔었다.

늦둥이인 엄마가 낳은 첫딸이었던 나는 아기가 아기를 낳았다며 온 식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언니들과 오빠는 나를 데리고 중계동 골목 어귀를 열심히 쏘다녔다.

나는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돼도 사촌오빠한테 안겨있기를 좋아했는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사촌오빠의 여드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더 이상 오빠의 품에 안길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오빠의 성난 얼굴에 놀라 그의 손조차 잡을 수 없었고 처음으로 두 발로 홀로 섰다.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눈 때문에 흐리게 보이던 골목, 비로소 키높이에서 똑바로 마주한 골목,

그 골목이 나의 유년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 타고난 건지 자연경관에는 전혀 흥미가 없고 빽빽한 빌딩 숲에 반응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유혹적인 붉은 불빛과 도시전체가 사이버 펑크의 기운을 내뿜는 홍콩, 평생 봐도 질리지 않을 황홀한 스카이라인의 뉴욕 등 네온사인이 빛나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큰 도시라면 사랑해 마지않았지만 내 마음속 일 순위는 언제나 서울이었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서울을 안 간, 못 간 이유는 스무 살 땐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성적이 아니었고 글을 쓸 수 있는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졸업한 후에는 다동이라는 느닷없고 벅찬 사랑을 만났고 그 눈망울을 두고 타지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취업한 후에는 굳이 떠나지 않아도 인생의 페이지를 넘겨줄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었다.


시내에 나가면 가끔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친다든가, 서너 명이 서있는 지하철 플랫폼에 우두커니 서있는다든가, 십 분이면 졸업한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세계에서 산다는 건 이제 나에게 고역이다.

이십 대 시절 연애를 하는 동안 대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데이트란 데이트는 다 한 것 같다.

이제는 엑스포다리에서 손을 잡고 싶지 않고 콧바람을 쐬러 동학사에 가고 싶지 않다.

교통비나 오고 가는 시간 걱정 없이 주말이면 대학로에서 보고 싶은 연극을 보고

여러 곳에서 열리는 전시회들을 섭렵하고

다양한 곳에서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을 만나고

문학과 예술을 하는 사람들과 접하고 그 속에서 글을 쓰는 것.


그보다 가장 하고 싶은 건


일을 마치고 집 앞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집중하기 좋은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하천을 산책 후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그 식당과 카페와 집이 있는 곳이

후암동이거나 사직동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몽테뉴는 '음미하고 소화할 수 있는 정열은 모두 시시한 것들뿐'이라고 했다.

기존의 정열은 모두 소화된 지 오래이고 이곳 대전에서는 이제 더는 먹어치울 게 없다.

지금 나는 아사 직전이다.


새로운 음식이 꼭 맞을지 탈 나게 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곧 다가올 서울라이프를 꿈꾸며 "먹고 죽기야 하겠어!"라고 외쳐본다.

(주의하랬죠... 촌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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