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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개굴 Aug 19. 2023

서울시 서울구 서울동

"서울 가면 어디서 살 건데?"

서울에 가기로 선언한 후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음... 난 오래된 곳이 좋아. 을지로? 대학로? 서촌 좋아! 자유로운 분위기였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지나치게 힙한 공간은 부담스러워. 아... 한강도 싫어. 물이랑 안 맞아. (어차피 비싸서 살 지도 못하지만) 그렇지만 동네에 하천이 있었으면 좋겠어!"

"......"


참으로 대책이 없는 대답이다. 만약 파리에서 살기로 한 누군가에게 파리의 어디에서 살 거냐고 물어봤을 때 저런 식으로 답한다면 틀림없이 '퐁네프 다리 밑 노숙자가 되겠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서울역 앞에서 깡통을 차지 않기 위해 진지하게 어디서 살지 고민해 보기로 했다. 어디가 있을까? 불현듯 불광동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지금은 없어진 불광동의 '불광문고'에서 김애란 작가의 강연회를 들은 적이 있다. 김애란 작가가 서울에서 처음 전셋집을 계약해 살게 된 동네가 응암동이라고 했다. 불광천을 걸었던 기억이 삶의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며 글이 안 풀리거나 복잡할 때 불광천을 많이 거닐었다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나도 불광천의 기운을 받고 그녀처럼 유명한 작가가 될지. 지도 앱을 두 손가락으로 확대하며 헛된 상상도 함께 키워나갔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서울 지도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는 게 문제였다. 가끔 TV 프로그램에서 '신촌에서 이태원까지의 거리', '여의도 면적의 100배' 등 당연히 시청자를 서울시민으로 염두에 둔 예시를 들 때가 있다. 나를 비롯한 지방 사람들은 그래서 도대체 신촌에서 이태원까지는 얼마나 걸리는지, 여의도는 얼마나  큰 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지극히 서울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나 친동생을 보러 꽤 자주 서울을 왔다 갔다 한 편이었지만 친동생이 사는 곳이 관악구 봉천동이라는 건 알아도 관악구는 무슨 구 옆에 있는지, 봉천역은 몇 호선인지 모른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지족동과 대덕구 오정동의 중간은 '서구 둔산동'이라고 딱 짚어서 말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익히 아는 서울의 지명이라고는 워낙 유명한 압구정동이나 망원동, 소설 강의를 들은 적 있는 서교동과 노고산동이나 족발 때문에 뇌리에 박힌 장충동 따위밖에 없다.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봐도 직장에 따라 주거지가 정해진 경우가 대다수였다. 아직 취업 생각도 없고 설령 취직을 한다 치더라도 회사 근처에서 살 생각은 없다. 도서관이 있고 산책로가 있는 조그만 방 한 칸이라면 족하다. 하지만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큰돈이 드는지 알면서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다.


나한테 서울은 '서울시 서울구 서울동'처럼 그냥 '한 덩어리'다. 아직 옷이 되지 못한 천과도 같다. 천이 옷이 되려면 원피스인지, 멜빵바지인지 디자인을 정하고 사이즈와 색깔을 골라야 하겠지. 사는 동네에서 무엇을 누리고 싶은지 동네에 사는 주민들은 대체로 어떤 사람들인지 따져보고 바느질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요새는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본 청운동이라는 동네가 고즈넉하고 아름다워서 눈여겨보고 있다.


아무리 예쁜 옷이라도 마네킹만 입을 수 있는 옷은 옷이라고 할 수 없다. 밥 먹다가 양념도 좀 흘리고, 체취도 배고, 목도 쪼글쪼글 늘어나야 옷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발 디딜 곳도 그랬으면 한다. 골목에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조금 풍기더라도 아무도 길냥이들을 해치지 않고 옆집에서 사랑싸움을 하는 소리가 종종 들리더라도 참치김밥이 유난히 맛있는 김밥천국이 있는 그런 사람냄새가 풍기는 곳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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