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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개굴 Aug 23. 2023

*보석을 찾고 있어요

*최성의 노래 '무지개를 지켜라'에서 차용.


사람 마음이 그렇다. 큰맘 먹고 오랜만에 찾은 미용실 거울에서 마주친 머리는 어느 때보다도 마음에 들고 몇 년째 입지 않은 옷장에 처박힌 옷은 당근마켓에 올리는 순간 당장 입고 싶어 진다. 대전을 떠나기로 결심한 후에야 비로소 30년을 사는 동안 몰랐던 대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 여름이면 꼭 먹었던 성심당 팥빙수를 자주 먹지 못 할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기도 하고 오리 가족들이 살고 있는 반석천을 한가롭게 거닐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걸음을 빨리 하기도 한다. 가장 아쉬운 건 샘과 떨어지는 일이다. 샘은 대전에서 찾은 보석 같은 친구이다.


서울에 가기로 다짐한 가장 큰 이유는 '사람'때문이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사람은 응당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사람이 고팠다. 물론 외로웠을 때도 있었지만 외로웠다는 뜻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집단'이 궁금했고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아이였다. 같은 꿈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싶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면서 허기는 더 심해졌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모두 서울에 모여 있을 것만 같았고 끊이지 않고 올라오는 공연과 전시를 보지 못해 감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서울에 있는 유명한 예술 대학으로 편입한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졸업한 후에는 아예 글을 쓰지 않았다. 영원히 쓰지 않고 살 자신도 없었으면서 이렇게 평생 살게 되리라고 체념했다. 그러다 샘을 만났다. 샘을 만나고 나서 알았다. 보석을 발로 밟고 있었다는 걸. 바보 같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애꿎게 찾아 헤매고 있었다. 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곳에 글을 쓸 일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가시지 않는 갈증이 남아 있었다. 나의 눈을 번뜩이게 할 또 다른 보석들의 세계가 서울에는 있지도 모른다고.


보석을 찾기 위한 첫 시도는 주말마다 홍대에서 열리는 영화 모임에 드는 것이었다. 티브이에서 보던 영화 평론가를 실제로 볼 생각에 설렜다. 어떤 사람들이 모임에 올지도 궁금했다. 너무 많이 준비한 티가 나지 않게 부푼 마음을 안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서울역과 홍대입구역까지는 가까워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모임이 열리는 곳은 미술학원이 즐비한 거리의 한 상가 안에 있는 카페였다. 거울을 흘깃 본 후 문을 열었다.

이미 몇몇 사람이 와 있었고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강사는 정시에 도착했다. 자기소개 시간에 한 남자는 "이제 비범하게 살려고요."라고 말했다. 남자는 트렌디한 타투를 새긴 양팔이 보이게 자꾸 소매를 걷었다. 머리가 긴 그 남자는 누구보다 평범해 보였다. 강사는 농담까지 계산한 듯 노련하게 모임을 진행했다. 나를 긴장시키는 사람이 없었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소개를 할 수 있었다. 모임이 진행될수록 부푼 마음은 꺼져갔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나도 그저 토요일 오후에 모인 외롭고 심심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임이 끝나고 뒤풀이가 있었지만 대전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대전에서 왔다고 하니 모두들 마치 부산에서 올라온 것 마냥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졸지에 대전에서 서울에서 올만큼 영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영화광이 되어버렸다. 민망해진 나머지 괜스레 KTX를 타면 한 시간밖에 안 걸린다고 힘주어 말했다.


맥주를 마시러 간다는 그들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재빠르게 기차표를 예매했다. 기가 쭉 빨려 힘이 없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배가 너무 고파 눈에 보이는 햄버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감자튀김을 쑤셔 넣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코에 피어싱을 한 남자, 헤드폰을 쓴 여자, 미니핀을 안은 남자, 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멘 입시 준비생들, 부츠를 신은 여자,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남자... 모두가 독특했기에 모두가 평범해져 버렸다. 모두가 반짝이면 아무도 빛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서울에 대한 동경이 눅눅해진 감자튀김처럼 시들해졌다. 문득 노래를 듣고 싶어졌다. 유리창과 이어폰으로 세상과 차단되니 사람으로 가득한 홍대에서 나만 혼자 관람객이 된 기분이었다.


"보석을 찾고 있어요. 회색 서울 속에서. 나의 임무는 단 하나. 무지개를 지켜라."

이 회색도시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무지개를 찾을 수 있을까? 무지개는 사실 하나의 빛이다. 비가 온 뒤 생기는 물방울을 통과하면서 여러 가지 색깔로 보이는 것뿐이다. 어떻게 보냐에 따라 한 사람에게서 일곱 개의 색깔을 볼 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아무 색깔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형형색색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모두 무채색으로 보였다. 대전을 떠나는 게 맞는 일일까? 가지 말까? 마음에 한차례 소나기가 내렸다. 이 소나기가 그치면 이 사람들이 무지개로 보이려나.

먹구름을 싣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한강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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