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온 지 일주일째.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이 글은 노원중앙도서관에서 쓰고 있다.
집을 구하기 전까지 당분간 큰 이모네 집에 머물게 됐다. 이모네 집이 위치한 노원구는 서울의 외곽이다. 바로 옆에 경기도 의정부시가 있다. 그래서 내가 살던 세종시가 붙어있는 대전시 반석동이랑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상업 시설보다 주거 시설이 더 많다. 눈에 보이는 건물 대부분이 아파트이다. 주거민 대부분이 가족 단위인 점도 닮았다. 마들역 주변에 마트와 영화관처럼 큰 건물이 있고 큰 건물 주변에 음식점, 안경점, 정육점 등 작은 가게들이 모여있는 모습도 노은역이랑 비슷하다. 가장 좋은 점은 두 곳 모두 공원이 지척에 있다는 점이다. 매일 저녁을 먹고 상계공원에서 산책한다. 대전에서도 산책을 자주 했지만 서울에 와서 산책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 바로 이모 때문이다.
이모는 한 끼도 허투루 먹이는 법이 없다. 서울에 온 첫날부터 양념게장과 과메기로 푸짐한 한 상을 차려주었다. 한 번 이모 앞에서 게장을 맛있게 먹은 뒤로 이모는 내가 오면 게장부터 준비해 둔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도 이모는 내 입맛을 잊지 않는다. 자취 N연차면서도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늘 간편한 인스턴트식이나 조미료 범벅인 배달음식으로 한 끼를 때우곤 했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는 두부두루치기, 임연수 구이, 청국장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밥다운 집밥을 먹으며 나날이 호강하고 있다. 일주일 만에 벌써 일 킬로그램이 쪘다.
"이모, 서울사람들은 정말 코를 베어가?"
어렸을 적 내 질문에 이모는 밥을 먹다가 콜록거리며 웃었다. 그때의 나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생과 함께 이모네 집에 며칠 동안 맡겨졌었다. 당시 이모가 살던 집은 아파트나 빌라가 아니라 상가 건물의 한 층이었다. 창문을 열면 촘촘히 늘어서 있는 다른 상가들만 보였고 새벽까지 자동차와 오토바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동안은 서울에 놀러 가도 엄마아빠와 함께였기에 낯선 곳이라는 인식이 들지 않았는데 방으로 새어든 네온사인 불빛을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하룻밤동안 처음으로 서울이 정말 큰 도시라는 걸 실감하게 된 것이다. 이모는 웃기만 하고 끝까지 답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밥을 남기지 말고 먹으라고 했다. 그러면 코를 베어갈 수 없다고 했다.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모 말대로 밥을 다 먹었다.
이모는 동생과 나를 데리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서울랜드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서울랜드는 서울에 있지 않다. 경기 과천시에 있다.) 놀이공원이라고는 대전의 꿈돌이랜드밖에 가지 못했던 나는 무척 신나게 놀았다. 오리배를 탄 동생이 울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과 앞니가 빠진 내가 활짝 웃으며 키 높이 신발을 신은 피에로와 같이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있다. 이모는 또 노원 롯데백화점에서 신상 신발을 사준 뒤 아웃백도 데려가 주었다. 난생처음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곳을 가봤는데 부시맨이라 불리는 빵이 너무 맛있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다 먹고 나서는데 빵을 또 줘서 이렇게 퍼줘도 되는지 진심으로 걱정했었다. 성인이 돼 보니 그만한 서비스까지 다 책정된 가격이라는 걸 깨닫게 됐지만 말이다.
일 하며 세 아이를 키우는데 조카들까지 신경 쓰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이모는 우리가 머무르는 동안 꼿꼿하고 다정하게 챙겨주었다. 다정한 건 쉬워도 꼿꼿한 건 어렵다는 걸 이제는 안다. 너무 푹신한 소파는 허리가 아파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이모가 한없이 다정만 했다면 나는 좀 서글프고 많이 불편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모의 꼿꼿한 태도 때문에 나와 동생은 '맡겨져 있다'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저 철없이 이모가 마련해 준 적당히 푹신한 소파 위에서 서울생활을 만끽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코를 베어갈 일은 없었고 우리는 무사히 대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도 도서관에 가기 전에 이모가 언제 오냐고 물어보았다. 이 말인즉슨 빨리 와서 저녁을 같이 먹자는 뜻이다. 덕분에 서둘러 글을 쓰고 있다. 누군가와 끼니를 함께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 귀찮기도 하지만 나쁘지 않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저녁 약속이 없는 건 나뿐인지 다들 슬슬 집으로 향하는 분위기다. 괜히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이모는 아침부터 일어나 당면을 삶고 있었다. 어서 빨리 윤이 나는 잡채를 크게 한 젓가락 집어 먹고 싶다. 집에 가는 길에는 이모가 좋아하는 붕어싸만코를 사가야지. 이모는 이런 걸 왜 샀냐고 하면서도 분명히 다 먹을 테다.
요새 열심히 공원을 돌고 있긴 하지만 왠지 이모가 해준 밥을 먹고 찐 살은 빼고 싶지 않다. 이모의 사랑이 나의 일부분이 되어 뱃속에 든든히 자리 잡은 느낌이다. 물론 언제까지 이모네 집에 있을 순 없다. 서울에 진정으로 뿌리내리려면 독립도 해야 할 것이다. 여긴 너무 크고 다양한 사람이 많으니 어렸을 땐 만나지 못했던 코를 베려고 마음먹은 나쁜 사람들과 마주칠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서울살이를 하며 기가 죽을 때마다 이모가 차려준 한 상을 떠올릴 것이다. 어느 지치고 힘든 날, 무작정 이모네 집을 찾아도 이모는 밥 먹었냐며 긴 말 없이 냉장고에서 김장 김치를 꺼낼 것이다. 돈은 없어도 가오는 있는 이모, 목소리는 간드러지는데 웃음소리는 호탕한 이모, 여전히 아저씨들한테 인기가 많은 멋있고 예쁜 우리 이모. 이모가 서울하늘 아래에 함께 있는 한 그 누구도 내 코를 베어갈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