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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개굴 Aug 29. 2023

서울다움

요즘 나는 영화 올드보이 속 15년 동안 갇혀있다가 풀려난 오대수가 빙의된 것 마냥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집에만 있으면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던데 그 말이 딱 맞다. 며칠간 서울에 있는 아는 인맥들을 몽땅 끌어다 차례로 만나고 나니 만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나서기로 했다. 오히려 좋다.


체감 영하 20도를 육박하는 날 추위를 무릅쓰고 찾아간 곳은 망원동이다. '진부책방 스튜디오'에서 좋아하는 소설가의 북토크가 열리기 때문이다. 망원동은 서울에서 그나마 제일 익숙하고 잘 아는 동네이다. 대전에 살 때부터 소설 수업을 들으러 꾸준히 간 곳이라 웬만한 골목들은 눈에 익었다. 함께 수업을 들었던 샘이와 수업을 빙자한 놀자판을 벌였더랬다. 망원시장 안의 베트남 음식집에서 쌀국수와 분짜도 먹고 망원즉석우동에서 우동과 돈가스도 먹고 앤트러사이트에서 수업 과제를 했다. 오늘은 샘이 없이 혼자 돌아다니려니 기분이 묘했다. 원래 같았으면 막차시간에 쫓겨 수업도 다 듣지 못하고 나와 택시를 잡고 고속터미널로 향했을 텐데 오늘은 아무리 늦게까지 놀아도 집에(내 집은 아니지만) 갈 수 있다. 마음이 너무 편했다. 콘서트나 뮤지컬에는 별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주변의 '덕후'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면 공연을 보러 갈 때 서울에 살지 않아 억울함을 느낀다고 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무리 없이 즐길 수 있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교통비, 숙박비 등 티켓값과 맞먹는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남들은 집에 가서 씻고 공연의 여운을 음미할 시간에 피곤에 절어 쓰러지기 바쁘다는 것이다. 나 또한 듣고 싶은 강연이 평일 오후에 있을 때 포기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서울에 살았더라면 퇴근하고 충분히 갈 수 있는 시간인데도 쓰린 속을 부여잡아야 했다. 이제 나는 어디든 가뿐히 갈 수 있다!


북토크에 가기 전 시간이 조금 남아 조그만 카페를 들렀다. 카페는 오래된 주택 꼭대기에 있었다. 눈 때문에 미끌미끌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서 두 번만 감성 있겠다간 저승길에서 커피를 마시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조그맣고 아담한 카페여서 그런지 이미 좌석이 꽉 차있었다. 핸드폰 번호를 적어두고 근처 미용실에서 앞머리를 잘랐다. 이름은 '너드'였는데 이름과 달리 상당히 힙한 미용실이었다. 자르면서 가격이 걱정됐지만 다행히 원래 다니던 대전의 미용실이랑 가격이 같았다. 운이 좋게도 머리를 자르고 미용실을 나서는 순간 카페 사장님으로부터 들어와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인 토스트와 과일을 먹으면서 책장을 구경했다. 이곳에서 브런치북 8회 대상 수상작인 유이영 작가의 <망원과 합정 사이>를 읽었다. 지방에서 상경했다는 점과 신문사에서 일한다는 점에 동질감을 느꼈다. 호기심이 생기는 제목만 골라 읽었는데 꽤나 재밌어서 구매해서 다 읽어볼 생각으로 책을 덮었다.

맞은편에는 배우가 꿈인 여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둘은 오디션에서 떨어진 이야기, 매너 없는 피디, 고된 촬영 대기 시간에 대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소재에 무심한 척하며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고생한 기억에 대해 말하는데도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그들은 드라마에서는 아직 단역 1, 2에 불과할지 몰라도 자기 인생에서만큼은 빛나는 주인공들이었다. 꿈을 위해 치열하게 사는 그들을 보며 서울이란 초고층 건물이 모여있는 곳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꿈의 벽돌을 쌓는 곳이라는 걸 실감했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높을 때 '서울다움'을 느낀다.


북토크는 기대했던 것만큼 좋았다. 사실 북토크보다 좋았던 건 9시에 끝나도 여유롭게 집에 갈 수 있다는 거였다. 마음만 먹으면 망원동에서 늦은 저녁까지 먹고 올 수 있는 시간이다. 올리브영에서 화장품을 고르며 뭉그적거려도 막차까지 아주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두 남녀가 내가 좋아하는 평론가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다.

"그 사람 mbti 가운데 글자가 nf인 게 분명해."

둘은 그가 쓴 글을 읽고 그의 mbti를 추측하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nt라고 생각한다) 7호선 군자역에서 문학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을 만나다니. 또 한 번 '서울다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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