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다시 쓰는 시간

by 김작가a

진단명 F39/F23.9를 살아낸 철학자의 사회 복귀기

단의 날

1997년 3월, 서울.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 앉아 있었다. 의사는 내게 말했다. “현재 상태는 주요우울증 삽화에 정신병적 증상이 동반된 것으로 보입니다. ICD-10 기준으로 F39, 그리고 급성 정신증적 장애로 F23.9가 함께 적용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내 삶을 바꿨다. 나는 병명이 아니라, 철학적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왜 무너졌는가. 그리고 이 무너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증상의 언어

F39 — 우울성 정신병. 무기력, 죄책감, 자살 사고, 현실 판단력의 저하.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고통이었고, 말을 꺼내는 것이 두려움이었다. F23.9 — 급성 및 일시적 정신병적 장애, 상세불명. 망상, 환청, 와해된 사고, 정서적 둔마. “누가 날 감시하고 있어. 내 생각을 훔쳐가.” 그 말은 내 입에서 나왔지만,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붕괴의 원인

1987년, “우리는 침묵하지 않겠다!” 그날의 함성은 내 인생을 바꿨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 함성은 내 안에서 나를 찢고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알코올 사용 장애(Alcohol Use Disorder), 그리고 사회적 고립. 이 모든 것이 내 정신증 발병의 위험요인이었다.

입원

자살 사고가 심화되었고, 나는 치료를 거부했다. 결국 동생이 보호자로 나섰다. 정신건강복지법 제43조에 따라, 동생의 동의와 전문의 진단으로 72시간 응급입원이 이루어졌다. 병동의 문은 무거웠고, 침대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약물치료

처방된 약물은 리스페리돈(Risperidone). 비정형 항정신병 약물로, 도파민 D2 수용체와 세로토닌 5-HT2A 수용체를 차단한다. 초기 부작용: 졸림, 식욕 저하, 불안, 근긴장 이상. 2주 후: 망상 감소, 환청 소실, 정서 안정. 의사는 말했다. “약물 반응이 양호합니다. 조현병으로의 이행 가능성은 낮습니다.”

나는 여전히 약을 의심했다. “이건 독이야. 내 머릿속을 조작하려는 거야.”

심리치료

치료는 약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지행동치료(CBT): 왜곡된 사고 패턴 수정

정신역동치료: 무의식적 갈등 탐색

집단치료: 동일 진단군과의 상호작용

미술치료: 감정 표현의 통로

나는 치료를 받으며 노트에 적었다. ‘병은 존재의 다른 이름이다. 정신증은 세계와의 충돌이며, 그 충돌은 사유의 시작이다.’

철학의 재발견

나는 철학을 다시 읽었다. 키르케고르 — “절망은 인간이 자신을 잃는 방식이다.” 니체 — “도덕은 약자의 복수다.” 사르트르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그들은 나보다 먼저 무너졌고, 그 무너짐을 언어로 바꾸었다. 나는 그들의 문장을 따라 나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병동의 일상

아침 7시 기상. 8시 약 복용. 9시 집단치료. 10시 미술치료. 점심 후 산책, 그리고 오후의 상담. 병동은 규칙적이었다. 그 규칙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발견했다. 같은 병을 앓는 이들과의 대화는 내 고통을 거울처럼 비추었다.

가족의 변화

동생은 매주 병동을 찾아왔다. 그는 나를 설득했고, 나를 지켰다. 어머니는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가족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우리가 아픈 게 아니라, 함께 아픈 거였어요.” 가족은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함께 울고, 함께 걸었다.

작가의 탄생

나는 『1997, 나를 다시 쓰는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썼다. 출판사에 보냈고, 편집자는 말했다. “이건 시대의 고백입니다.” 나는 웃었다. “이건 나의 탄생입니다.”

사회 복귀

1997년 12월, 나는 병동을 나왔다. 복학이 아닌 복귀였다. 나는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을 타고, 시장을 걷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처음엔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 이번엔 나를 지키면서.” 나는 F39와 F23.9라는 이름을 받아들였고, 알코올이라는 그림자와 싸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노트에 마지막 문장을 썼다.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기록한다. 이 시대를, 나 자신을, 그리고 너를.’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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