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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May 14. 2021

사랑을 정의한다면


어릴 적, 사랑이 궁금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남녀 배우가 서로 사랑한다고 울고, 웃고, 힘들어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다. ‘사랑’은 무엇일까. 만약 누군가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해보라 묻는다면 정확히 뭐라고 확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 사랑에 대한 의문을 조금이나마 풀어준 소설이 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

사랑의 무서움, 아름다움, 발칙함, 아픔....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소설이었다.

그중 내 마음에 크게 와닿은 사랑에 대한 구절을 옮겨보겠다.     



우리가 '나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런 상태에 빠져들 때 원래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 사십 년이 되었는지, 아니면 삼십 년이나 육십 년이 되었는지도 상관없다. 앞으로 오십 년 더 머리를 굴려본다 해도 그것에 대해서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가끔은 사랑이 어떤 다른 존재처럼 우리 안으로 칩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몇 달 동안, 심지어 몇 년 동안이나 주위에 숨어 우리를 엿보다가 어느 때인가 기억이나 꿈들의 방문을 받고 우리가 갈망하며 숨구멍을 열 때, 그때 그것이 숨구멍을 통해서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우리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과 뒤섞인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칩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 두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신 작가님이 존경스럽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서 종신형 죄수처럼 살다가 감옥을 부수고 나와 자유를 만끽하는 사랑이란 표현은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는 우리를 거의 완벽하게 묘사한 것 같다.     


사랑.

당장 우리 주변만 봐도 많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 음악 안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어쩌면 진부 할 수도 있지만 결국 사람의 삶은 사랑으로 흘러가고, 이어지고, 숨 쉬는 것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다가오겠지.

20대의 사랑도 30대의 사랑도 40대의 사랑도.

어제의 사랑도 오늘의 사랑도 내일의 사랑도.     


난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훗날 나이가 많이 들어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사랑을 정의 내려 보지 않겠다.


그저 내 안에서 눈치를 보다가 뛰쳐나온 사랑이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을 나의 몸과 마음으로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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