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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파고 25화

8.3 차이

8장. 시간의 궤적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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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현재”의 주가는 해당 종목의 “미래” 가격을 시장에 속한 이들이 어떻게 “예측”하는지 미리 반영해 구성되기도 한다. 그처럼 단순히 <내일>을 어떻게 예측하는지에 따라, 다름 아닌 우리의 <오늘>이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삶이라는 유속은 단선적일 수 없다. 무수한 물살이 교차하고, 부딪히고, 비틀리고, 얽히고 또 설킨다. 우리가 그리 겪는 시간은 결코 깔끔한 선형 배열일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단순히 줄 맞춰 늘어선다거나, 사건들이 하나하나 분리된 점으로서 독립적으로 자리한다는 가정은, 어쩌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그저 상상 정도에 그치는 무엇일 양이다. 어쩌면 사후적으로 사고하기 편리하고자 그토록 자주 그리 가정되었으리라.


말하자면, 오늘은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그 영향을 받고, 그리 해석된 과거는 어제 해석한 과거와는 분명 다른 과거이며, 마찬가지로 오늘은 또한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는지에 그 영향을 받고, 그리 예측한 미래는 어제 예측했던 미래와는 조금이라도 다른 미래일 테다. 이는 이를테면 오늘이 어제와는 완연히도 다른 그만큼이나 명백히 다른 까닭이라.


이처럼 단순한 예제가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삶이라는 유속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엉켜 포개어져 그 미궁 안에서 미궁 자체로서만 운동하지 않던가. 예컨대, 오늘의 내가 하는 선택은 과거의 기억, 경험, 상흔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 선택은 또 미래의 어떤 가능성을 열어젖히거나 때로는 봉쇄하기 위한 무엇이기도 할 테니. 그러나 그렇다고 그게 전부일 리도 없으리라. 과거는 단순히 현재를 밀어내는 배경으로만 거기 서 있는 게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거꾸로 재해석되고 때론 다시 쓰이기도 하듯, 현재는 과거를 덧칠하며, 미래 또한 저리 현재를 예감케 하기도 한다. 그 셋은 서로를 끊임없이 덮치며 덧칠하는 중이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늘 도전 앞에 선다. 매 지금 저 순간마다 딛는 걸음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또 어디를 향하나? 물론 저기 저 궤적은 늘상 모호하다. 우리는 언제고 아득한 혼란에의 통과 와중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 과거 습관이 현재 욕망과 충돌하고, 현재 욕망은 미래를 예감하며 어긋날지 모를 불안에 얼마간 교란된 채 살아간다. 동시적 사건들뿐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조차도 하나하나 외따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뒤얽힌 채 서로를 뒤집어 호출하며 그리 ‘차이’ 자체로서 운동하는 것이다.


물론, 저기 저 ‘차이’들의 이 무수한 미궁은 때로 고통이겠으나 또 언젠가는 구원이기도 할 텐데. 말하자면 예의 미궁에 갇혀 종종 방향을 잃고 무너지며 때론 스스로 누구인지 그 이름표(정체성/존재론)에 굳이 집착하는 방식으로 사로잡혀 허우적거릴 수도 있으리라. 또 한편으론 이 미궁 덕택에 우리는 매 순간 다시 구부러지고, 틀어지고, 재조정되며, 바로 그래서 달리 또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저 단순한 직선의 삶, 단순한 반복의 삶, 단순 고정된 순간의 삶은 어디에서도 또 누구에게서도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인 모양으로. 예컨대 질서는 반드시 더 커다란 무질서를 비용으로 산출하며 온통 뒤엉켜 연결된 채 도래하거니와. 오직 무수한 차이들의 이 혼란스레 엮인 골목들의 반복 사이에서만 삶은 생동하는 것이다.


그처럼 숱한 차이들이 뒤엉킨 이 유속은, 다만 반복이나 질서의 부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차이인데 아울러 새로운 질서나 반복의 재구성이기도 할 양인바. 그리 과거, 현재, 미래가 붕괴하고 다시 엮이며, 또 사건들이 부서지고 다시 이어지며, 어쩌면 그 간격에서 무언가 새로이 만들어질 수도 있으리라. 그 안에서 다시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으며, 또다시 잃고, 또다시 나아가는 바와 같이 끝없이 고뇌하는 건, 그리 하염없이 동일한 고민을 반복하는 건 끝끝내 고민하던 문제에의 해결이라는 없던 사건의 전혀 새로운 탄생을 비로소 과녁 삼아서가 아니던가. 바야흐로 저 해결책은, 동일한 고뇌의 ‘반복’을 통해 탄생할, 그러나 그 반복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될 만치 이전엔 없던 비결이라는 ‘차이’를 구성하는, 그처럼 이전 고뇌의 반복을 멈추고 전혀 새로운 고뇌의 반복을 새롭게 촉발할 수 있을 저 ‘차이’를 또한 촉발하는 그런 해결책 아니던가 말이다.


그렇게 유속은, 저 끝없는 미궁에의 ‘반복’ 속에서만, 그러니까 이토록 복합적인 ‘차이’들이 작용하는 딜레마 내에서만 비로소 살아가는 중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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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