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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파고 26화

9.1 패턴

9장. 운동하는 무늬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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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마주치는 온갖 상황에서 마치 법칙은 없는 양 느껴지지 않던가. 저 모든 아우성이 우연이라는 무작위적 주사위 놀이로 난파하여, 끝끝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도달한 게 아닌가 하는 상념에 잠기기도 하는바. 체계적으로 운동하리라는 어떤 당연한 신뢰가, 그저 주먹구구로 동작하는 무수한 절차 앞에서 다만 편견에 불과했다는 게 드러날 적, 저토록 신뢰할 수 없는 표류 속에서 누가 어떤 아우성을 그토록 열렬히 제출하던가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운명적이고 우연한 아우성조차, 세부적인 필연성이 작동한 작용의 결과일 수 있으리라. 가령 오늘의 날씨라는 우연 또한 대기의 대류와 습도의 논리를 담지할 테니. 말하자면, 그리 무작위적인 아우성들조차 무수한 운동이 뒤엉킨 끝에 서서히 드러나는 특정한 무늬들로 구성되지 않던가. 예의 무늬들을 우리가 흔히 ‘질서’라 부르기도 하지 않던가. 따라서 질서 또한 결코 영원히 고정될 수야 없으리라. 무수한 변화 와중 임시로 떠오르는, 언제든 붕괴할 수 있는, 그러나 그럼에도 일정한 결을 가진 운동의 모양새라는 정의에서 ‘질서’ 또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고로 그러한 ‘질서’란 오직 사후적으로만 판결될, 그리하여 매번 다시 가정될 가상의 가이드라인일 텐데.


이를테면, 별은 수억 년에 걸친 질량과 중력의 상호작용 말미에 드러난 궤도라는 패턴을 가지기도 한다. 신체 또한, 무수한 세포 분열과 신경 작동, 호르몬 순환 등에 무수히 얽힌 와중 임시로 안정된 특정 리듬, 그러니까 특정 동적 구조를 가진다. 심장 박동, 호흡, 감정, 심지어 무의식적 충동들까지도 그처럼 얽힌 운동의 단위 패턴들을 이룬다. 패턴들은 언제나 운동 위에서만, 변화 속에서만 상호 간 작용하며 성립한다.


그러므로, 저 무늬 또한 절대적이거나 불변할 리 없을 텐데. 우리는 자주 그 무늬들을 본질이나 본성처럼 다루고자 하는 서툰 욕동을 답습하기도 하나, 기실 본질이나 본성은 사고상의 편의를 위해 붙이는 임시 가격표 정도의 명칭 아니던가. 예컨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따위, “이 관계는 원래 이런 식이다.” 따위, “세계는 본래 이런 것이다.” 따위 등의 자랑스러운 의기양양함 따위들처럼. 허나 저 흔하고 얇은 도피적 서술들은, 실은 잠정적이며 가변적인 패턴을 순간적으로 붙잡아 놓(았다 주장하)는 묘사 정도일 뿐. 무늬는 언제고 깨어질 수 있고 재구성될 수도 있으리라. 따라서 삶이란 유속이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 양 보일 적도 있으나, 실상 패턴을 구성하며 움직이는 데 아울러 이를 넘어서는 시도, 또 이를 다시 조정하려는 몸짓, 그리하여 새로운 무늬를 ‘본의 아니게’ 산출하는 운동으로서만, 그러니까, 치열한 ‘반복’의 결과로써만 ‘차이’를 구성하는, 또 치열한 ‘차이’의 관리로서만 ‘반복’을 구성하는 바로 그런 운동으로서만 오직 지속될 수 있는데 아울러 그리 지속되고 있을 수밖에 없지 않던가.


우리는 그 연쇄 안에서, 저 무늬를 때론 좇으며 안정을 구하고, 때론 이를 깨뜨리며 변화를 추동하는바.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고뇌(해야 )할 터다: 지금 마주한 패턴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는 무얼 가능케 하고 무얼 가로막나? 이는 어떻게 깨어질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깨어져야만 하는가, 혹은 왜 깨어져야 하나?


말하자면 이 무늬의 운동으로서의 저 생성과 붕괴, 그 끝없는 유동성 위에 성립하는 무대는, 때로 무의미한 아수라장인 양 보였다가 완전하고 고정된 질서인 양 보였다가 하더라도, 그 단위 사건 속에서 우리가 다만 그것이 아수라장이기 위한 ‘유효성’ 혹은 질서이기 위한 ‘유효성’을 감식하고자 했던 결과에 불과하리라. 그러면 어째서 우리는 자기도 몰래 자동으로 이들을 감식하고자 하게 되나?


이 자동-‘유효성’ 각자는 과연 무얼 토대하는지, 그리하여 우리는 저 무늬가 각자의 무슨 욕망에 기원했으며, 여전히 저 무늬가 욕망하는 게 무엇일는지 또한 살필 수 있을 텐데. 그 무슨 거대한 명분 위에서도 실제로의 동력은 그리 자랑스럽게 스스로 연출해 호소하는 공적 동기가 결코 아니라, 사소한 사적 욕동이겠으니. 어쩌면 예의 명분을 자랑하고 싶은 욕동이기도 하겠으니. 우리는 저 무늬를 구성하는 욕망이, 그처럼 삶의 유속을 구성하는 저 욕망이, 그리하여 스스로 복잡하다 주장하기도 하는 저 시끄러운 사적 욕망이 과연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일일이 그 공적 단위를 구성하는 단순한 욕동으로 해부해 볼 수도 있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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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