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운동하는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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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무늬건, 그게 구성되기 전 혼란스러운 상태가 자리할 텐데. 혹, 비로소 구성된 무늬 또한 그저 혼란의 특정 조직화일 뿐일는지. 어쩌면 온갖 무늬가 모여 겨우 이루어 내는 더 커다란 무엇이야말로 혼란일 수도 있으리라. 이는 때론 질서의 부재일 수도, 때론 질서 초과의 가능성과 운동을 과잉으로 품은, ‘질서 이전의 시간’이자, ‘질서 너머의 조건’일 수도 있을 양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무늬, 구조, 언어는, 그 자체로 끝없는 마찰과 흔들림 위에 변모 중이나, 언어가 언급하는 저 <고정된> 대상은 인식을 위해 일단 정지해 있는 양 간주된 허상 아니던가. 바로 저 예측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변모 전반을 ‘혼란’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바다의 파도는 무작위적으로 출렁이겠으나, 저 내부엔 조수와 중력, 지형의 운동 질서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으리라. 그리 단위로 분해된 혼란은 단순 난잡이 아니라, 아직 구조화되지 않은 수많은 질서의 잠재적 충돌지점이기도 하겠으니. 간혹 혹자가 혼란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것이 익숙한 무늬를 해체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새로운 무늬를 어떻게든 생산하도록 강요하기 때문 아니겠는지(이른바 혼란이 이 생산 전, 그러니까 생산 실패의 상태 정도 아니겠는지). 혹자에게 저 익숙한 무늬는 ‘본질’이고 낯선 무늬는 ‘침략’일 수도 있을 사건 따위가 있었을지 모르나, 다만 이는 시간과 함께 그 위치가 계속해서 바뀔 모양이다.
종종 그리 방향을 잃곤 한다. 방향이 너무 많아 방향을 정할 수 없는 상태에 내몰리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 이는 ‘자유’롭다 자인되기도 하는 상태 아니던가. 다시 말해 모든 방향이 잠정적으로 가능한 상태이나, 이 ‘자유’는 종종 너무 많은 선택지와 견디기 어려운 불안과 도망치고 싶은 책임과 함께 도래하기도 하는바. 그래서 비교적 손쉬운 어떤 무늬들은 도피의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모든 책임을 돌릴 선례들이, 앞선 판사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한 판례들이 판단 이전부터조차 미리 검토되는 모양으로. 앞선 판단은 선례가 되어 검토되기 이전 이미 옳아야만 하는 문장이 된다. 뱉은 말은 검열 없이 옳아야만 하는, 그리하여 무슨 말을 하건 그 말이 <벌써> 정답이 되어야만 하는 기묘한 정서적 퇴행(우쭈쭈)이 구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주장하는 ‘본질’이 자꾸 바뀐다는 걸 그 자신만 <힘껏> 모르게 되는 셈으로, 그는 그것이 자신만의 개성이자 본질이라고, 그리하여 자기만의 ‘무늬’라고 스스로에게 주장하며 자가 해석하곤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에게든 무늬는 일종의 안정이고 예측 가능성이며 또 때론 자기 동일성의 환영 아니겠나.
그러므로 어느 지점에서 모든 무늬는 자연발생적인 혼란을 외면한 증상이며, 그처럼 저 모든 현실 부정은 다시금 증상이라는 혼란을 뒤집어 호출하기도 한다. 우리가 안간힘을 써서 붙들어 놓은 세계관, 정체성, 윤리, 체계는 끊임없이 금이 가고 균열이 생기며 이 혼란의 파도에 <반드시> 다시 휩쓸린다. 이후 다시 이를 동력 삼아 새로운 무늬를 구성하고, 다시 또 붕괴한다. 그렇게 삶이란 유속은, 무늬와 혼돈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며 나아가는 셈이리라.
끝내 혼란은 그저 질서의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니라, 질서가 출현할 동력이기도 하며, 또 질서를 끊임없이 위협함으로써 질서 자신의 탄생 이후의 작동 논리에 또한 숨을 붙여놓는 동력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변화, 생성, 창조는 어느 정도의 혼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양이므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는지. 고요하고 단단한 자아라 여겼던 어떤 가정된 “체질”조차, 그 기저엔 혼란이 도사릴 수밖에 없을 테니. 체질론은 그 체질을 구성하는 패턴을 설명하기 싫다는 뜻이다. 세월은 마침내 바로 그 “체질”을 변모하게도 종용하곤 하지 않던가 말이다.
어쩌면 편의상의 개인적 질서로 간주되곤 하는 바로 저 ‘자아’를 가정하고 사용하여, 바로 저 혼란을 온전히 마주하고자 우리는 글을 쓰고, 고민하고, 그리하여 매번 새로운 무늬를 ‘본의 아니게’ 짓고자 하는 게 아니겠는지. 각 무늬가 결코 영원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혼란은 그것이 파괴를 규명하건 기원을 규명하건, 무슨 동력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으리라. 그게 온갖 질문 이전의 호흡이건, 갖은 결론 이후의 비명이건, 숭배의 대상이나 신비의 대상일 리 없는, ‘누구나 가진 딱 마찬가지’의 동력이기만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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