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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파고 28화

9.3 생동

9장. 운동하는 무늬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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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흐른다.

경계를 가르고, 이름을 붙이고, 기억을 새기고, 감정을 흔들고, 함정을 주파하고, 타자를 마주하고, 언어를 퍼 올리며 뒤엉킨 시간으로부터 끝없이 다시 태어난다.

이 모두를 거쳐 비로소 도달할 장소는 과연 어디인가? 혹, 그리 끝끝내 붙잡을 원형이 있긴 한가?

기실 생이란, 저 무슨 귀결에도 닿지 않은 채로, 늘 스스로를 갈무리한 채로 ‘살고 있는’ 유속 자체에 불과하지 않던가.


생동은 하나의 상태일 리 없다.

그건 형용사도, 명사도 아닌 — 끝없이 탈피하며, 순간마다 형성되었다 다시 부서지는 ‘운동의 리듬’에 다름 아니다.

마치 바람을 따라 무늬를 바꾸는 잎사귀처럼, 우리는 매 찰나 다시 조금씩 다르게 울려 번진다.

리듬은 질서를 끌어들이면서도 언제나 무언가 밀쳐내고, 새로운 질서를 재구성하면서도 또다시 무너뜨린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바로 이 반복되지 않는 반복 위에서, 끝나지 않는 차이 위에서, 저 부서지고 이어지는 무늬들 위에서 숱한 혼란을 겪어 감내하는 방식으로만 주어지지 않던가.


생동은 체온일 리 없다.

어떤 정체성의 이름일 리도, 여느 정신의 일관성일 리도 없다.

이름 붙기 전 무수한 힘들이 서로를 교차하여 견디며 어긋나고, 물들고, 비틀고, 미끄러지고, 다시 붙잡히는 가운데 깃든, 이른바 ‘구성 불가능한 구성’이리라.


혹자는 종종 세계를 한 문장(전체성)으로 요약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 문장은 자신의 진술과 아울러 다만 무수한 명제 중 어느 하나의 명제로서, 그가 요약하려 한 세계의 일부 정도 따위(파편성)에 그치는 방식으로만 진술된다.

이름은 유속을 셈하는 틀이지만, 그 틀은 언제나 금이 가고, 파편을 낳고, 다시 흔들려, 또한 다시 유속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저기 저 유속을 쏟아내고야 만다.

생동은 무슨 짧은 찰나에도 닫힌 기호로 남을 수 없으며, 다만 끝없이 수정되고, 연기되고, 유예되는 언어의 파열 속에서만, 어딘가 향하려는 몸짓인 양 언뜻언뜻 숨을 고를 수밖에 없다.


사유는 언어를 통해 굴절되고, 감각은 기억을 통해 덧칠되고, 타자는 동일자를 <반드시> 비틀고, 그리 동일자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스스로 동일자라는 신화 아닌 타자라는 실재하는 미지의 향방으로 조금이라도 밀려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하는 진술의 전제만큼도 잘 알지 못하며, 그리 그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부터조차 이미 타자인 것이다.

그 온갖 틀어진 변형, 그 모든 복합적인 유속이야말로, 결국 ‘나’라고 불리는, 언젠가 동일자로 착각했던 바로 저 타자의 유속을 형성한다.

그것은 어느 한 점에도, 무슨 한 순간에도 고정되지 않은 채로, 무수한 점에 연결될 수 있으면서도 흐트러진, 완결의 부정과 부활과 생성의 연속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일시적 관절의 패턴들이다.


생동은 한 치도 정지 상태일 리 없다.

죽음은 어떤 단절이나 사건이 아니라,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무늬의 폐쇄이자 관절의 분리 혹은 통일 아닐는지.

따라서 저 하염없이 틀어지는 연이은 사태들이야말로, 무엇보다 살아있다는 보다 선명한 증거 아니겠나.

이 불완전한 유속은, 바로 그것을 돌아 살피는 연이은 순간에조차, 다름 아닌 바로 그 유속을 살피는 저 행위에 의거하여 다시 구성되는 중이겠으므로.

아직 맺음말을 영영 완성하지 않은 채로, 또 여전히 문장 바깥에서 숨 쉬던 채로.


그리하여 선결된 고백 아닌 미결의 질문으로서의 생동만이 있으리라.

가령 이 유속은 어디로, 어떤 지속으로 이어지나.

또, 가령 <정확히 어떤 혼란>의 와중에 있던가.

구체적으로,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혼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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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