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시간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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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우리는 순간을 붙잡을 수 있다고 믿는 양 행동하나, 그 어떤 순간도 기실 지속 위에서‘만’ 명멸한다. 순간은 항상 지나가며,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그 무슨 순간도 고립될 수 없다. 가령 ‘지금’이라 부르는 무엇조차 실은 그저 과거의 반복 따위 거나 미래의 전조 따위에 다름 아니겠으므로.
예컨대, 무언가 결단할 때조차 그것은 과거의 어떤 습관, 기억, 울림에 의해 미리 빚어진 셈이며, 동시에 그 결단은 미래에 다시 반복되거나 의도적으로 부정되거나 또 되새김질 될 특정한 패턴의 일부로 작동하겠는바. 순간은 결코 닫힌 방 안에 홀로 태어나지도, 그리 살지도, 또 그리 죽지도 않는다. 순간은 언제나 운동의 교차점에서만, 다만 찰나의 빛살 정도 따위로 출현할 따름이다.
시간이란 언제나 운동으로서만 감지된다. 그저 ‘지나간다’는 감각, ‘흘러간다’는 감각, 그러니까 정지하거나 고정된 상태에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이 유속을 사후적으로‘만’ 뒤돌아봤을 때, 그리 추론된 정신적 가상의 가장 작은 마디를 우리는 ‘순간’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 가정된 정신적 가상이 아닌 바로 이 현실에서 순간이란 애초에 고립된 무엇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될 수 없이 그저 잠정적 전제 따위로만 자리할 뿐이다.
이를테면, 소위 ‘한순간’은 그저 지금 여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과거의 연장선으로부터 착륙을 시도 중이고, 동시에 미래를 예고하며 열리는 중이다. 예컨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취향은 어디선가 갑자기 솟아난 게 아니겠으므로. 오래전 경험들이 지금 이 순간 정신에 다시 누적되고, 과거의 울림이 현재의 감각을 뒤흔든다. 반대로, 현재의 어떤 사소한 선택과 움직임조차 앞으로의 방향을 예고한다. 지금 내딛는 발걸음, 지금 주고받는 문장, 지금 내뱉는 호흡 한 가닥이, 훗날의 궤적을 비틀어놓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소위 ‘나’라는, 정신적 일관성이라고 사후적으로 가정된 임시 단위에 무수한 경험들이 영향을 주는 까닭으로. 그러나 그리 끝도 없이 변모하는 무엇을 과연 ‘일관성’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지.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일 리도, 내일의 ‘나’일 리도 없지 않겠는지. ‘자아’부터가 무엇보다 사고의 ‘편리’를 위해 가정된 ‘신화’ 따위인 양 보인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아무 곳에서나 이리저리 언급되곤 하는 저 흔하디흔한 소위 ‘자아’가, 단절되고 고정된 일관성 아닌 경험의 교차로 정도로서 그 의미를 가지듯, 순간 또한 그저 단절된 점으로서가 아닌 시간의 교차로 정도로서 의미를 가지지 않겠나.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그 찰나의 틈에서, 우리는 순간에 붙잡히기도 하고, 그 덕택에 무너지거나 다시 결심하여 일어서기도 하겠으니. 그러나 그 어떤 순간도 고정된 채 박제될 순 없는 것이다. 사진 속 정지된 표정조차, 실제로는 끊임없이 떨리고 흔들리는 시간의 일부였으며, 또 아울러 그 사진은 그게 설령 디지털 데이터로서라도 시간을 따라 낡아가고 있으니까.
더군다나 <지속이라는 현실>을 인식하는 인간에게라면 더더욱 순간은 불안정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불안정은 순간을 순간으로써 감지하게 하는 역설적 힘이다. “이건 끝나버릴 거야.” “이건 계속될 수 없어.” — 그런 위태로운 자각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찰나를 그 자체로 의식하게 한다. 무언가 기억하고자 하고, 붙잡고자 하고, 또 반복하고자 하는 충동이 바로 이 불안정한 순간의 흔들림에서 비롯되지 않겠는지. 우리 신체는 살아간다지만, 기실 그것은 시간의 노선을 따라 죽어가고 있는 셈이겠으므로.
기실 저기 익숙한 가상 너머 현실에서는 그 무슨 운동도 그리 순간들 따위로 나뉠 수는 없다. 가령 위치 변화라는 익숙하고 흔한 어떤 운동조차, 각기 가지고 있는 위치 에너지가 있을 텐데. 가상의 순간은 이 힘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 채로 좌표만 떠 있을 수밖에 없겠으므로, 운동 자체가 아닌 그저 지속하는 이미지의 조각을 참칭하고자 할 뿐, 운동하고 있는 사건의 진정한 조각을 가질 순 없는 것이다. 여기 ‘순간’이 애써 붙잡는 건 그래봐야 이미지 따위뿐이며 그조차 불안정할 터.
허나 삶은 자체 운동으로서 숨 쉬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다. 매 위태로운 순간이 오직 ‘정신적 편의’를 위해 사후적으로 가정되기 이전, 경험적 삶은 나눌 수 없는 온전한 유속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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