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과학과 달리 사회는 분명 주술적이다. 우리는 ‘사탕이 달다’라는 1차적 명제에 기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저 ‘사탕’이 인기가 많다는 소문이나, 제조지가 어디인지 적혀있는 문자에 의존해 정보를 믿고 ‘움직인다’. 실상 유행에 쉬이 나부끼는 팔랑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법적으로 명시된 제품의 성분에 대해 믿지 않을 도리는 없다. 혹은 어떤 성분이 몸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따위 또한 전문 연구자가 아닌 이상 여느 권위에 의존해 ‘믿을’ 수밖에 없다. 정보의 바다에는 파도가 너무 많고, 종종 우리는 그 모든 파도들의 전문가가 되기에는 여력이 없다. 정보가 많아서 생기는 문제 또한 이처럼 믿음의 문제인데, 정보가 없어서 생겼던 원시시대의 문제가 종교로 해결 비슷하게 매듭지어졌다는 건 필연으로 보인다.
필연. 그렇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애써 필연을 찾는다. 어쨌거나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안 믿을 수도 없는 까닭이다. 극단적인 태도는 쉽다. 모조리 믿거나 아무것도 믿지 않는 건 쉽지만, 어떤 건 믿고 어떤 건 믿지 않는 기준을 세우는 건 어렵다. 너무 경우의 수가 많고, 상황도 많고, 자료도 많고 그래서 맞는 경우보다 틀리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틀리면 소위 우람하고 늠름해야 할 우리네 자존감이 감히 떨어지고야 만다. 어쩌면 이 모든 선택이 확률 게임으로 환원될 수도 있다. 연역의 문제를 통계의 문제로 착각할 수도 있고, 정서적인 호불호의 문제를 귀납의 문제로 착각할 수도 있다.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틀린다. 틀리는 걸 감수해야 다음번 달성 확률을 높일 수 있다. 틀리기 싫어서 자존심이 상해서 뇌를 사용하지 않고자 마음을 먹으면, 기억이나 상상, 원망 속에서만 살게 될 수도 있다. 아, 뇌를 사용하긴 하는구나. 이런 상황에 우릴 던져넣은 조상을 원망한다든지, 세상을 원망한다든지, 현실주의자들을 원망한다든지, 혹은 그런 세상에도 살아야 하는 ‘자기 자신’을 비장하게 위로하며 그렇게 스스로 주인공인 공상 속에서만 살든지. 그래서 거기서 나오지 말든지. 영원히 안 나오면 모르겠는데, 나오면 어쨌든 우리는 책임도 져야 하고 살아가야 하고, 그렇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건, 아무거나 믿는 것처럼 우리를 살 수 없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운명을 긍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 사탕이 인기가 많건 성분이 뭐건 간에 일단 본인에게 이 ‘사탕은 달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감각적인, 그리고 정서적인 ‘필연’이다.
이 주술적인 사회를 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을 거라면, 우리는 기준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 특별한 왕도는 없다. 겁나 틀렸다가 고쳐야 한다.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자존심이 좀 상해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기준을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판사의 말은 말에 그치기도 한다. 그러나 판사가 그날 아침 먹은 김치찌개가 짜다고 부하직원에게 하는 증언과 재판에서 하는 ‘선고’의 ‘위력’은 다르다. 선고는 높은 확률로 현실이 된다. 그처럼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느냐, 혹은 효과를 가지고 있긴 한가를 토대로 우리는 ‘필연성’을 추론할 수 있다. 이 기준 많은 사회에서 우리는 필연성을 찾는다. 필연성은 절대적 현실을 움켜쥐고 있다. 절대적 현실에서 우리는 굶으면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안 절대적 현실이 있나? 있다. 어쨌든 사회는 물리법칙에 의해서만 돌아가지 않는다. 약속에 의해서 더 많이 돌아간다. 등교를 날아서 할 수 없는 건 물리법칙이지만, 등교를 해야 한다는 약속이 잡혀 있는 건 자기 자신과의 약속과는 다른 약속이다. 아니, 약속을 지키건 말건 내 자유 아닌가. 안 지키면 처벌하는 건 너무 억울한 거 아닌가. 도둑질하면 벌 받는다. 근데 도둑질하지 말자는 약속에 동의한 적 없다. 억울해도 벌 받아야 한다. 사회적 약속은 자기 자신과 한 약속과 다르다. 친구와 한 약속과도 다르다. 책임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억울하건 말건 상관없다. 사회적 약속, 물리법칙은 우리끼리 합의해서 생긴 약속이 아니다. 이미 있던 거다. 이미 있던 거는 우리 자신이 자기 자신과 한 약속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러기엔 기분이 나쁘다.
종종 날아다니지 못해서 억울한 사람이 발견된다. 아니, 버는 만큼밖에 소비를 못 해서 억울한 사람이 발견된다. 왜 자본주의에 태어났는지 원망할 수 있다. 여기가 중세고 내가 귀족이면 일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 않냐고, 자신감 있게 원망할 수 있다. 근데 생각보다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 같다. 이 주술적인 사회적 약속에 대해 동의한 적 없고, 이 물리적인 법칙에 대해서도 동의한 적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실 그게 정해질 때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력은 왜 작용해서, 참. 개탄스럽다. 근데 원망이 얼마나 많아지냐면, 이제 모두가 성공을 해야겠다 외치고 있다. 이건 사고 싶은 물건에 대한 욕망과는 다른 욕망이다. 사고 싶은 물건은 구체적이다. 어제 본 저거 사야겠다 싶다. 반대로 성공은 매우 추상적이다. 사실 그냥 옆 사람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거다. 근데 그냥 우월한 게 아니라, 상대가 열등감을 좀 느꼈으면 좋겠다 싶은 거다. 그러니까 내가 잘 살아서 상대가 배 아팠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여러모로 배 아프기 때문이다. 왜 아픈지는 비밀이다.
이걸 잘 포장하면 돈이 된다. 절대적 현실에 대한 도피를, 필연성에 대한 도피를 다시 기업가들이 필연성을 토대로 분석한다. 그러니까 소비자는 배가 아픈 게 아니라 성공에 대한 열정이 있는 거다. 크흠. 우리 기업이 이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는 데 보탬이 되어 주겠다. 꿈만 꾸는 소비자가 꿈을 이루게 해주겠다. 꿈은 이루어져야 하고, 남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건 나쁜 게 아니다. 건전한 열정이다. 이제 그 방법을 알려주겠다. 근데 일단 이대로 해서 난 했는데 니가 못하면 노력 부족이다. 괜찮다. 노력 부족도 니탓이 아니라 동기부여 탓이다. 동기도 부여해 주는 상품이 여기 이렇게 있다. 이 문장과 실천들은 니가 노력하고 싶게 만들도록 구성되어 있다. 회비 내고 따라 해라. 관리해 주겠다. 여기 후기도 있는데, 효과 있으니 일단 맛만 봐라. 등등.
끝끝내 시대가 이렇게 말한다.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 자칭 소비자들의 자아가 점점 비대해진다. 마침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 아닌가? 보고 싶은 것만 열정적이고 진지하게, 어른스럽게, 엄격하고 근엄하게 보겠다. 그러니까 절대적 현실이라는 비극 말고 달달한 형용사 뭐 없냐고, 현실에 자기 내면을 ‘기획해서 투사하게’ 해주는 형용사 뭐 없냐고 공급을 재촉한다. 수요가 다시 수요를 부른다. 경제가 돌아간다. 형용사로 점철된 경제다. 아주 개성 있고 재치 넘치는, 임기응변으로 구성된 자본주의가 돌아간다. 애초의 경제가 합리적이진 않았다지만, 이제 어마어마하게 문학적이다. 형용사가 아주 카리스마 넘치게 구성되어 있다. 알차다. 아주 카리스마 있고 단단한 억양과 부드럽고 여유 넘치는 문장 구성으로, 현실 도피에 박차를 가한다.
이루어져라, 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