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와서 제일 먼저 제 눈에 띈 것은 책장이었어요. 한국 떠난 지 오래되어서 제 방에는 제 물건이 없어요. 자기 집에 가면서도 해외여행 가는 것처럼 모든 짐을 다 싸가지고 가야 한답니다. 세면도구에 잠옷에 슬리퍼까지 바리바리 사 가지고 와야 해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집에 가면서 무슨 짐을 가지고 가냐고 해요. 집에 제 옷도 물건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에요.
제 방에 남아 있는 것은 책상과 몇 권의 책입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니 색이 바래 있네요. 시간도 오래 지났고 햇볕에 노출되다보니 빛바램이 당연하겠죠. 제 삶을 관통했던 코드는 여행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좋아했어요. 대학생 때는 국내 여행 위주로 다녔고 직장을 다니면서 해외여행을 시작했어요. 제 첫 번째 해외 여행지가 북경과 상해였던 것은 신의 설계였을지도 몰라요.
그때만 해도 보수적이었던 직장 분위기 때문에 유급 휴가 일주일 쓰는 것 이외에 연월차 사용하려면 눈치를 봐야 했어요. 어떻게든 시간 쪼개서 여행을 다녔어요. 시간 상 남미하고 아프리카는 퇴직 후에 가려고 남겨 놨어요. 저도 퇴직하면 뭔가 할 일이 남아있네요.
지금까지 여행 다닌 돈 모았으면 수도권의 작은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었어요. 현재 시세로는 불가능하지만요. 작은 아파트 샀으면 자산가치는 몇 배로 올랐을 거예요. 그랬다면 저는 체코 프라하에서 카를교 오고 가는 사람들 보면서 다리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중국 귀주성 카이리에서 캐리어 통째로 도난당하고 씩씩거리지도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 하면서 고산병으로 헥헥거리지도 않았겠죠. 비록 여행으로 유형의 자산은 남지 않았지만 제 마음과 기억에는 무형의 자산이 남았습니다.
외로운 별 Lonely planet은 가이드북이 없던 여행지에 대한 유일한 정보원이었어요. 매년 1월 1일 새해가 되면 그해에 갈 여행지를 선정하고 6개월 동안 관련된 역사, 문화나 소설들을 읽으면서 준비하고 여행을 갔다 오면 그 추억으로 나머지 6개월을 살면서 일 년 일 년을 보냈어요. 지금 세어보니 론리 플래닛이 21권 있네요.
시오노 나나미를 좋아했어요. 역사평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시오노 나나미의 모든 책을 다 읽었고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시오노 나나미를 부러워했어요. 열독 했던 시오노 나마미의 책도 색이 바래가고 있어요. 롤모델은 시오노 나마미였는데 현실은 사무실 안에서 맴맴 돌면서 일하는 일개미예요.
중국에 와서 살면서 좋았던 것은 여행하기 편하다는 거였어요. 한국보다 유럽하고 가깝고 비행기 편수도 많아서 홍콩을 금욜 밤에 갔다가 일욜 밤에 왔어요. 홍콩 하고 마카오를 주말에 마트 가듯이 오고 갈 수 있었어요. 코로나 이전에는 중국 살면서 중국 국내 여행보다는 중국에서 출발해서 다른 나라를 가는 해외여행을 많이 했어요.
2019년 11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비드 19로 인해 저는 인류 최대의 감옥에 수감되었어요.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한국도 오기 힘들어요. 제로 코로나로 도시 봉쇄를 릴레이 하는 상황에서도 가끔 중국 국내 여행은 했어요. 중국은 한 영토 안에 4계절을 다 가지고 있는 나라예요. 광시장족지구 난닝南宁에 가면 베트남 놀이 가능하고 윈난성 징홍景洪에 가면 태국 놀이 가능해요. 하이난海南·에 가면 하와이 비슷하고 놀 수 있고 헤이롱지앙성 헤이허黑河에 가면 러시아 놀이 가능하고 모허漠河에 가면 심지어 오로라 하고 백야도 볼 수 있으니까요.
상해의 플라타너스 나무는 초록 초록한데 아파트 안 나무에는 단풍이 들었네요.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요. 상해에서 가지고 온 옷으로는 추워서 스타필드에 가서 겉옷 하나 사서 입었어요. 지난해 온통 공사판이었던 동네도 이제는 제법 정리가 되었어요. 아직도 공사 중인 아파트도 있고 조경 공사도 계속하네요. 공사판은 제 반려 친구인가 봐요. 수변공원을 산책하기 좋은 밤이에요. 제 방의 책들은 빛바랜 시간으로 있지만 길을 걷고 있는 제게 이 밤은 빛나는 시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