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남에서 북으로 흘렀다
저장성 항저우浙江省 杭州에서 시작해서 베이징 통조우北京 通州까지 연결한 대운하예요.
저장성浙江省, 장쑤성江苏省, 산둥성山东省, 허베이성河北省,4개의 성과 장강长江, 황하黄河를 관통해 흘러요. 전체 길이는 1,800Km에 달한다고 하네요. 기원전부터 조금씩 공사를 했대요. 7세기 수나라 때에 정저우郑州까지 연결하는 1차 대운하를 만들었고 명나라 때는 거의 직선에 가까운 2차 운하를 만들어요.
만리장성, 피라미드와 더불어 인류 역사 상 3대 토목공사라고 하네요.
새로 물길을 만든 것은 아니라 기존에 흐르는 지천과 강을 연결했어요. 2014년에 방대한 규모, 수리공정, 당시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이끌었다는 여러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어요.
중국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 맛집이에요.
이탈리아 다음으로 문화유산이 많은 나라예요. 50개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어요.
황제가 탄 배가 지나갈 때 배를 운항할 수 있을 정도의 수량과 속도가 안 나올 때면 수로 양 옆에서 백성들이 배에 밧줄을 연결해서 끌었대요. 이 수로를 연결하기 위한 토목공사에는 당연히 백성들을 동원했고 제대로 된 급여와 처우 없는 노동착취가 있었죠.
중국은 서고동저 지형이에요.
서쪽에는 산도 많고 높은 편이지만 동쪽은 비교적 평지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 그렇게 들었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루 아래 뫼이로다의 태산의 높이가 고작 1,500m이라는 것을 알면 배신감을 느끼죠. 뭐야 해발 1,500m 높이로 태산이라니…
중국은 서에서 동으로 장강과 황하가 흘러서 자연스러운 수로가 있었지만 중국 대륙을 가로가 아닌 세로 방향으로 연결하기 위해 인공 수로가 필요했죠.
바다를 이용하는 해운도 가능했지만 날씨 등의 변수, 해적의 침탈 등을 우려해서 통제 가능한 내륙의 운하를 선호했다고 해요. 편한 길, 대운하를 택했지만 중국이 나중에 바다에 대한 지배권과 해군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어요. 마냥 편하고 좋기만 한 것은 없다는 것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네요.
지류와 강을 연결하면 물이 술술 흘러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네요.
가물면 배를 띄울 수 없었고요. 특히 산둥성 쪽은 지대가 높아서 물이 흐르기 어려웠어요.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 갑문을 만들고 수차를 만들어서 수량과 속도를 만들었어요.
대운하의 가장 큰 용도는 조운을 위한 것이었어요.
황실에 필요한 물자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내기 위해서 운하가 필요했죠. 배 운항의 우선순위도 당연히 황실 물자를 실은 배였고 귀족들의 물자를 실은 배 그다음 상인들의 배였어요. 산동성 쪽에서는 배에서 물건을 내려서 수레에 옮겨 싣고 가기도 했다고 하네요. 남선북차南船北车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래요.
대운하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많지 않대요.
당시 그 배를 타고 가거나 관련되었던 사람들이 한자를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대요. 아이러니하게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한국인 최부의 <표해록>에 대운하에 대한 기록이 있대요. 한국의 마르코폴로라고 할 수 있는 최부는 대운하 말고도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가는 길에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고 <표해록>이라는 기록 유산으로 남았어요.
예전에는 문자는 가진 자들의 도구였죠. 지금은 누구나 기록할 수 있고 남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요.
만리장성이나 대운하나 모두 통치자를 위한 공사였고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남아 엄청난 입장료를 올리지만 그 수익도 결국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것이네요.
지금은 시멘트, 모래, 자갈 같은 건설 부재자나 곡식종자같이 가격이 낮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화물만 운반하는 느림보 운송 수단이 되었지만 경항대운하가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수도는 여전히 난징이었을 거예요.
인류 역사 최고最古이자 최대의 수로의 물은 북에서 남으로 흘렀는데요.
대운하 건설과 운영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통과 눈물은 어디로 흘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