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숙제-나는 누구인가로 글 써오기
제가 은행원으로 평생 일할 줄은 우리 엄마도 몰랐을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 대학교 4학년 때 취업을 할까, 진학을 할까 진로를 정하죠. 전공을 좋아했던 저는 대학원에 가서 지방행정을 전공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어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 도서관에 신문을 볼 수 있었어요. 서서 신문을 넘겨 보는 것이 일상이었죠. 조선일보는 안 보고 주로 동아, 중안, 한겨레 신문을 보는 데 그날따라 조선일보를 봤어요. 조선일보에 외환은행 신입행원 모집공고가 났네요.
당시만 해도 신문에 대기업, 공기업들이 신입사원을 모집한다고 광고를 냈어요. 태어나서 그때까지 은행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시험과목이 영어, 상식, 전공이네요. 시험 과목이 만만해서 원서를 냈어요. 손으로 써서 원서를 우편으로 부쳤다고 하면 지금 학생들은 어디 원시 시대에서 부싯돌로 불 붙였다고 생각할 거예요.
서류 전형, 필기시험 통과하고 면접 보러 갔더니 면접비 3만 원 주네요. 아이 좋아라. 면접장에 들어갔는데 제게 질문을 별로 안 하네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것 저 것 물어보던데요. 그래서 3만 원 받은 걸로 명동에서 당시 유행하던 패밀리 레스토랑 가사 친구하고 실컷 먹고 집에 왔어요.
며칠 뒤 신입행원 교육 있으니까 짐 싸서 본점으로 오라고 하네요. 출퇴근 교육에 연수원 교육 합쳐서 한 달 교육받았어요. 보통 사우, 사가, 사훈 이런 단어를 쓰는 데 은행은 행우, 행가, 행훈 이런 단어를 쓰는 게 어색했어요.
같이 연수받는 동기들 중 저만 해외 연수 안 갔다 온 것 같고 저만 이성 친구 없네요. 장관 딸도 있고 다른 은행장 딸도 있고 아니 이런 공주, 왕자들이 왜 은행을 들어온 거죠. 나중에 보니 공주, 왕자들에게 일을 시킬 수 없으니 저 같은 무수리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은행에 돈 있고 권력 있는 집 자식들은 그냥 뽑아요. 이 사람들은 그냥 은행을 다녀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무수리로 10년을 일했어요.
1998년 10월 1일부터 한국에서 고용보험 제도를 시작했어요. 고용보험료를 사업주와 가입자가 부담하면서 저희도 고용보험료를 내기 시작했어요. 아니, 은행원이 실직할 일이 뭐가 있다고, 고용보험료를 내야 하냐고 다들 투털투털…97년도에 IMF 사태가 났고 그 혼란과 고통의 과정을 현장에서 겪었어요. 다이아몬드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은행들이 줄줄이 합병, 피합병을 했어요. 우리는 고용보험금을 받을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명예퇴직이라는 단어는 일상이 되었고 제일은행원들이 만든 눈물의 비디오는 슬프게도 베스트셀러처럼 유통되었어요.
외환은행은 은행 합병 폭풍 속에서 버텼지만 우리나라 역사 상 최대의 빨대 꽂기였던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했어요. 앞으로 론스타가 은행을 어떻게 할 거라는 소문은 무성했고 그렇게 되면 명퇴금도 못 받고 정리해고 된다 이런 웅성 속에서 저는 10년을 일한 은행을 그만두었어요.
당시 상가를 하나 샀는데 명퇴금을 나머지 잔금을 치렀어요. 그 상각에서 다달이 임대수익이 나오면 그 돈으로 제 용돈 하면서 공부를 하겠다는 저의 달달한 기대는 3년 동안 공실로 있던 1억 팔천만원에 분양받았던 상가를 3천만 원에 팔면서 쓸개맛으로 끝났어요.
그 사이에 하고 싶었던 공부와 여행을 했어요.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다시 뭔가를 해야 했어요. 은행원이 아닌 저는 행위무능력자였어요. 중국 여행을 좋아했고 중국에 관심 많았던 제게 산둥성 취푸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연세대에서 한국어 강사 양성 과정을 이수하고 2008년에 취푸로 갔어요.
처음으로 해외 생활을 하면서 여러 경험을 하고 중국이란 나라와 조금씩 친해지고 알아갔어요. 2년 간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한국어 강사일을 할 수 있었지만 박수 칠 때 떠나야 한다는 마음이었어요.
2011년도에 다시 북경으로 오게 되었어요. 아는 분의 회사에서 북경 법인을 설립한다고 해서 주재원으로요. 법인 설립까지 했는데 사업 모델을 찾기 쉽지 않아서 고전하는 중, 아는 분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중국 스탠더드차타드 은행을 연결해 주셨어요.
저는 경력단절 8년 만에 다시 은행원이 되었어요. 스탠더드차타드에서 코리안마켓을 담당했지만 SC의 상품, 운용방법, 서비스 모든 것이 코리안 마켓과 맞지 않았어요. 1년 동안 일하다가 한계를 느낀 저는 한국으로 귀국해야 하냐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같이 SC에 계셨던 분이 지금 왕징에 있는 한국계 은행들에 제 자리가 보인다고 조언해 주셨어요. 우리, 신한, 하나은행에 이력서를 냈어요.
우리은행에서 먼저 연락을 주셔서 저는 SC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중국우리은행으로 이직했어요. 한국에서 외환은행을 10년 다녔는데 중국에서 우리은행을 10년 넘게 다니게 될 줄을 저도 몰랐어요.
은행원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쩌다 은행원 되어서 지금까지 은행원을 하고 있는 저는 우리은행 금수강남지행 제갈현욱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