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00>, <남경사진관>
1842년 이전까지 상하이는 황푸강변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지금은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상하이 번호판 ‘후(沪)’는 어민들이 쓰던 어구에서 유래했다. 난징조약으로 개항한 뒤 영국은 상하이의 지리적 이점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조차지를 설치했고, 서구 열강들이 앞다투아 뒤따랐다. 외국인과 서양 문물이 밀려들며 상하이는 ‘동양의 파리’, ‘마두(魔都)’라 불리는 근대 도시로 성장했다. 1882년 아시아 최초로 전등을 밝히고, 백화점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으며, 밤마다 화려한 불빛이 켜졌다. 따쓰지에(大世界) 같은 대형 실내 오락장에서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파티를 즐겼다. 오늘날 외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 도시가 베이징이 아니라 상하이인 이유다.
상하이는 중국의 수도가 아니다. 중국의 수도는 베이징, 북쪽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과거 남쪽에 있던 수도는 난징이다. 난징은 7대 왕조가 도읍한 천년 고도였고,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런 난징에서 보면, 불과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지도에서 표시한 글자색도 희미하던 변두리 상하이가 오늘날 중국의 경제 수도가 된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역사는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다. 난징조약이 없었다면 상하이의 번영도 없었다. 상하이의 시작은 양쯔강에 정박한 영국 군함 코넬리스호(Cornwallis)였다.
1937년, 일본군은 상하이를 침략했다. 이미 근대식 군대와 무기를 가지고 있던 일본에 청나라 식 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중국 군대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장제스는 퇴각하면서 쑤저허 중요 물류 창고 쓰행창쿠(四行仓库)에 88사단의 한 연대를 남겼다. 지휘관 셰진원과 약 300명의 병사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영화 <팔백(八佰)>은 이 전투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그 저항은 아이러니하게도 난징대학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상하이에서의 고전과 생각보다 강했던 중국군 저항에 앙심을 품은 일본군은 난징을 함락한 뒤, 6주 동안 민간인 30만 명을 무차별 학살하며 살인, 약탈, 강간 등 온갖 나열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천년 수도 난징을 피와 절규로 물들이며 철저히 파괴한 난징대학살은 상하이 쓰행창쿠에서 시작되었다.
2025년, 항일전쟁 전승 80주년을 맞아 개봉한 영화 <남경사진관>은 이 대학살을 배경으로 한다. 우체부 아창(극중 가명), 사진관 사장과 가족, 일본군에 협력하는 통역사 왕광하이와 그의 연인. 전쟁을 일으킨 자도, 참여한 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광란의 칼날이 번뜩이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극 중 아창이 몰래 빼돌린 사진, 소시민이 기록한 역사는 전후 전범재판의 피할 수 없는 증거가 되었다.
상하이를 연 난징조약, 상하이에서 비롯된 난징대학살. 영화 <800>과 <남경사진관> 이 두 영화를
보면 상하이와 난징의, 두 개의 시작은 서로 얽히며 현대 중국사의 비극을 드러낸다.
이 시작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상하이에서, 난징에서,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를 짓밟을 권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