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and difference of opinion
대한민국에서 정치란 민감한 주제이며, 때론 그저 프레임 싸움이기도 하다. 28살 프리랜서(aka백수)인 내가 한국정치 그리고 정치 자체를 논한다는 게 어쩌면 건방진 시도일 수 있으며, 나는 이 분야에 무지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치에 대한 내 생각을 한번 끄적여보려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정치던 마찬가지일 텐데, 한국의 정치는 이항대립 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다. 마치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마치 생식이라는 것이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녀의 이중성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유사하다. … 그리스 세계에서는 아폴론적인 조각가의 예술과 디오니소스적인 비조형적 음악 예술이 그 기원과 목표 면에서 크게 대립하고 있다고 우리는 인식한다. 아주 다른 이 두 가지 충동은 서로 평행하고 있다(니체, 22-3).”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Histoire de la folie (1961)를 통해서 광기를 억압하는 이성의 불합리를 폭로하고 그 위계질서를 무너뜨린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1968)을 통해서 2500년 이상을 군림하던 이데아를 그 왕좌에서 폐위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 L'écriture et la différence(1967)를 통해서 문자와 발화의 위계를 바꿔놓으려 한다. 이 세 명의 철학자―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분류되길 거부했던―들은 공통점을 갖는다. 서양사상사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이항대립의 위계를 부수려 했다는 점이다. 세상은 당연히 미친놈보다 정상인을 선호하고, 가짜보다 원본을 선호한다. 그리고 글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기보다 면대면으로 직접 전달하는걸 더 진정성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들은 그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불문율과 같았던 이 전통적 사고방식을 바꾸려 했으며, 성소수자, 여성, 이민자와 같이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들―혹은 중심부가 아닌 주변주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3H―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면, 위의 3명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니체, 프로이트, 맑스의 영향을 받았다. 나는 특히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비극의 탄생』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이항대립, 그리고 그의 조화와 공존이 그들의 사유에 무의식적으로 깊이 뿌리 박혀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니체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공존을 말하듯이, 푸코는 광인과 정상인의 공존을, 들뢰즈는 원본과 복사의 공존을, 데리다는 말과 글의 공존을 외치는 것 같다.
이러한 이론을 정치에 대입할 수 있다고 본다. 다음은 극단적인 예시다.
좌파냐 우파냐. 친북, 친중이냐 혹은 친미, 친일이냐.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자연보호냐 개발이냐. 검찰개혁이나 의료개혁이냐. 국민의 힘이냐 더불어민주당 이냐. 윤석열이냐 이재명이냐. 등 우린 정치판에서 수많은 이항대립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어느 특정 세력을 지지하거나 그 관점에서 정치를 해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자, 유권자로서 그저 바라보는 현상을 말하고 싶다.
앞에서 다소 거칠고, 극단적으로 한국 정치세력을 나누어보았다. 이러한 두 세력은 물과 기름과도 같으며,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처럼 함께 존재한다. 서로 견제하며, 비판하는 사이이지만 그들은 양립해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보수 없이 진보, 진보 없는 보수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팽팽한 긴장관계와 크리틱이 국가의 발전과 존속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선 존재의 배경인 지평이 있어야 하며, 그의 존재를 인식해 주는 타자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내 모습을 볼 수 없다. 거울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내 얼굴을 볼 수 있지만, 그러한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다른 사람의 인식론적 지평에서 볼 수는 없다. 다른 말로, 완벽한 자기 객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당이 있으면 여당이 있어야 하며, 여당이 있으면 야당이 있어야 한다. 입법자 또한 인간이기에 완전한 것을 내놓을 수 없다. 앞면은 광이 나는 동전일지 몰라도, 뒷면은 녹이 슬고, 곰팡이 낀 맨홀뚜껑처럼 보일 수 있다. 시각의 다각화와 관점의 다원화. 그것이 이들의 공존이유이며, 정치가 단일한 세력이 아니어야 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맞냐 그르냐는 관점에 따른 해석에 의한 판단이다. 사회적 약자라면 그들을 위한 법을 찬성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낸 세금으로 다른 사람들만 먹여 살린다고 불만을 표출할 수 있다. 반대로,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하는 법안이 통과될 경우, 부자들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정책이기에 환영할 것이며, 서민이나 빈민층은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로운 혜택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정책, 법안에 대한 판단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란 동일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그 사회에는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과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복잡한 장이다. 그래서 한 사람도 빼고 모두에게 이로운 법을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빈부, 나이, 직업, 정치적 성향, 지역, 성별 등 이 모든 차이들을 초월하고, 모두가 찬성할 수밖에 없는 법안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한 정책이 실현이 되나 할 때, 누군가는 그것을 지지하고, 누군가는 반대한다.
광화문 광장, 서울시청 근처 등 사람들이 많이 이동하는 번화가에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그 사람들의 행동 자체를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며, 다른 누구는 행동은 이해해도, 그의 사상은 반대할 수 있다. 왜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저런 정당과 저 후보를 지지할까? 아니 어떻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저런 정치색을 가지지? 우린 이런 생각을 가지기 쉽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고 해석해봐야 한다.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과 정치적 지지는 결국 그 자신의 지평과 인식에 의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정치적 신념은 그가 자신의 인식틀로 바라본 세상에 대한 그의 선택이다. 그래서 우린 그의 정치적 성향을 마냥 비난해서는 안된다. 직간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위의 사진을 보라. 과연 저 사각기둥 위에 피라미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 사각기둥에 구멍이 있는 것일까?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린 그 선택이 최선이 되도록 혹은 차악이 되도록 골라야 한다. 결국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 혹은 차악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 좌와 우로 나뉘어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서 더 나은 미래로 이끄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팬덤문화와 결합되고, 혐오로 물든 이 2024년에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F.W. 니체, 『비극의 탄생』, 곽복록 역, 동서문화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