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Nov 23. 2022

광야의 낙타

Way to go

 

 니체는 그의 저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인간의 영혼은 세 단계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과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알고 보면 다르다. 플라톤은 영혼을 세 개로 나눈 것이고, 니체는 영혼을 낙타의 영혼, 사자의 영혼, 아기의 영혼 순으로 진화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진화의 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람의 영혼을 이성, 기개, 욕망으로 삼분(三分) 한 것이다. 논지에서 벗어난 것일 수도 있는데,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은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생각나게 한다. 이성에 대한 부분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하는 『순수 이성 비판』을, 기개에 대한 부분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실천이성비판』을, 욕망에 대한 부분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인『판단력 비판』을 생각나게 한다. 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과 칸트의 3대 비판서는 진(眞), 선(善), 미(美)에 대한 사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니체는 인간의 영혼을 세 단계로 나누었으며, 낙타보다는 사자가, 사자보다는 아기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낙타의 영혼은 가장 열등하며, 아기의 영혼이 가장 우월하다. 사막의 낙타는 자신의 짐가방에 무엇이 든지도 모른 채, 그저 묵묵히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사막을 건넌다. 낙타는 그 가방에 얼마나 중요한 것이 있는지도 모르며, 가방을 열어볼 용기도 없다. 심지어 낙타는 주인이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판옵티콘에 수용된 죄수처럼,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 채 스스로 모범이라 생각한 모습을 연출한다. 낙타는 뒤를 돌아볼 용기도 없고, 주인이 누군지 물어볼 용기도 없고, 자신이 옮기는 짐이 무엇인지 궁금해할 용기도 없다. 아니다. 궁금한데 용기가 없어서 알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알고 싶을 만큼 계몽되지 않은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낙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주인이 자신의 뒤에서 따라오는 줄 알았는데, 주인이 없었기 때문에 놀랐다. 어쩌면 애초에 주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인이 없음을 알고, 광야에 혼자 덩그러니 놓인 낙타는 자신이 무엇을 옮기는지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짐가방을 다급히 열었다. 세상에. 짐가방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낙타는 자신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로 자신의 임무도 애초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달은 낙타의 영혼은 이제 사자의 영혼이 된다.


  사자의 영혼을 가진 자는 낙타의 영혼을 가진 자들을 부릴 수 있다. 낙타는 겁이 많아서 사자에게 덤빌 용기가 없다. 그래서 사자는 동물의 왕국을 형성하며 호의호식한다. 하지만 사자는 어딘가가 허전하다. 사자의 영혼은 순수함을 잃었고, 순수함을 되찾고자 한다. 그래서 사자의 영혼은 아기의 영혼이 되고 싶어 한다. 


  니체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낙타의 영혼으로 살아간다. 그 낙타들은 사자의 영혼을 지닌 소수가 지배한다. 하지만 아무도 아기의 영혼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자들은 아기의 영혼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고, 어떻게 도달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최소한 사자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굉장히 낙타의 영혼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그저 시키니까 하고, 시켜서 한 일을 칭찬받으면 좋았다. 남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의문을 던질 용기가 없었다. 난 그저 타자에게 예속된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었다. 하지만 미셸 푸코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니체의 책을 읽음으로써, 이 모든 당연한 것들이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아 프리오리 한 구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 과감하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전환점에서 나는 낙타의 탈을 벗고, 사자가 되었다. 사막과 같은 이 세상에서 견디려면 낙타가 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세속에 맞춰서 등에 혹이나 달고, 짐이 옮기는 낙타가 되느니, 광야에서 포효하다 탈수로 죽는 사자가 되고 싶다. 


  광야의 낙타는 죽었다. 아니 그 탈은 벗겨졌다. 그 자리엔 오직 사자만이 포효하며 어떻게 아기의 영혼으로 진화할지 고뇌한다. 광야에서 수분이 모자라도 괜찮다.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광야에서 죽어도 좋다. 누군가 내 시체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광야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좋다. 누군가 나를 찾고 있다면.


네이버 블로그

작가의 이전글 If I were Michel Foucaul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