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이 Apr 04. 2020

이건 병이니까요.

병원 이야기

실습으로 나갔던 정신과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23살, 대학교 4학년이었고, 그는 자신을 21살 재수생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실습 때 환자와 관련된 보고서를 쓴다.
그가 입원하게 된 배경, 증상, 현재 치료들을 확인하고, 내가 간호사로서 그에게 치료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작성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환자정보를 꼼꼼히 읽었다.

그의 진단명은 우울증이었다.
몇 차례의 자살시도로 병원을 방문한 이력이 있었고, 현재는 병원에 입원하여 약물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약물치료를 하며 상태가 호전되어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의료진은 그의 상태를 지켜보며 조만간 퇴원 계획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와 병원 앞마당을 걸었다.
따뜻한 햇살이 병원 앞 잔디밭을 가득 채웠다.
많은 환자들이 햇살을 쬐기 위해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그와 나도 다른 환자들과 같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산책을 했다.

그는 나에게 손목을 보여줬다.

- 많이도 그었죠.

치료적 의사소통을 배운 것도 같은데, 이럴 때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수능을 망쳤어요.
대학에 못 갔죠. 나에게 거는 사람들의 기대가 있는데 그걸 채울 수가 없었어요.

'살다 보니 사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닌데...'
나는 환자에게가 아닌 나 자신에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환자의 사연에 안타까워했다.

- 사람들은 저에게 늘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해요.
좋은 생각을 하라고 하죠. 긍정적으로, 밝은 생각을 하래요.
근데 그거 아세요?
이건 병이에요.
이건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요.
이건 병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제가 나약해서 그런 것처럼 또다시 저를 궁지로 몰아요.

저도 모르게 제 손목을 긋고 있었어요.
극도의 우울한 감정이 저를 지배하면 제가 인식할 수 없게 그런 일이 일어나요.
밝게 살고 긍정적으로 마음먹으면 암이 고쳐지던가요?
제 병도 그런 거예요.
나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 네 맞아요. 병이에요. 이건 병이니까 처방받은 약을 잘 드셔야 해요. 약물로 조절하는 거예요.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요.

나는 침착하려 했지만 사실 적잖게 당황했다.
나는 간호학을 배우는 학생답게 최대한 그에게 사실에 기반한 답변만을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이 얼마나 나를 크게 흔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은 내 안의 무지와 편견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우울증을 진단받은 환자임을 알았음에도 그의 사연을 듣고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안타까워했다.

그것은 그의 의지나 선택이 아닌, 치료되지 않은 질병의 결과라고 나조차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의 기억은 나에게 강하게 남아 매 순간 환자를 만날 때마다 나의 무지함 혹은 편견 때문에 환자의 질병을 바로 보지 못하거나, 환자를 내 멋대로 판단하지는 않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아픈 사람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나약하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힘내라는 말로 치유되지 않는, 그의 노력이나 의지로 조절되지 않는 질병으로 인해 극단의 상황으로 가게 되는, 그저 치료받고 관찰하며 증상을 지켜봐야 하는 병을 가진 환자였을 뿐이다.

이전 06화 compassion fatigue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