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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이 Apr 06. 2020

그가 매일 일기를 쓰는 이유

병원 이야기

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갔을 때 무언가를 노트에 열심히 적고 있는 그를 보았다.

반듯한 필체가 눈에 들어와 나도 모르게 그가 적는 것을 읽어버렸다.

-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다. 발작 후 깨어나 보니 응급실인 것이 벌써 3번째다.

그는 일기를 쓰고 있었다.
훔쳐본 것만 같아 미안했다.

그의 팔에 혈압계를 감으며 물었다.

- 일기 쓰시는 거예요?
- 네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지 몰라서요. 어느 날 이전 일들이 모두 기억이 안 날 수도 있고...

그는 뇌종양 환자였다.
그가 진단받은 교모세포종이라는 뇌종양은 예후가 좋지 않아 진단 후 5년 생존율이 10%가 되지 않는다.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본인의 질병을 받아들이기까지 그 역시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그 하루의 시간조차 슬퍼만 하고 있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구토를 동반한 두통 증상을 느끼고 병원에 내원해 질병을 진단받기 전까지 별다른 것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여명이 5년도 채 안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하루하루가 너무도 소중했다.

매일의 기억이 조금씩 흐려지고 잦은 발작으로 인해 어딘가에서 쓰러져서 눈을 떠보니 병원인 경우가 늘어났다.

그렇게 나의 어제와 그제를 잃는 것 같은 기분에 그는 하루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리고 그 하루를 더 행복하고 유쾌하게 살고자 했다.


- 일기가 도움이 많이 돼요. 일어났던 일들도 기억하고 과거의 치료, 처방도 기록해두니 꺼내서 보게 될 때가 있고 그렇네요.
가족과 보낸 즐거운 시간들을 적어뒀다가 보면 기분도 좋아지고, 하루를 더 행복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들고요.
- 필체가 참 좋으세요. 매일 일기를 쓰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를 해 놓으시다니 대단하세요.

그는 멋쩍은 듯이 웃었다.

사실 그가 언제까지 기억을 유지할지 알 수 없다.
그에게 '괜찮아지실 거예요. 소중한 일들은 오래 기억하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현실을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난 그의 필체, 일기를 쓰는 행동만을 칭찬한 채 그의 자리에서 나왔다.

나는 매일 일기를 쓰는 그의 노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절망의 순간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군가는 무기력하게 자신에게 닥쳐온 이 상황을 비관하거나,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남은 시간을 슬퍼하고 원망하며 보내기도 한다.

그가 쓰는 일기는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로 보였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질병과 그로 인한 기억의 상실을 맞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잊혀가는 추억, 소중한 시간들을 기록하고 싶은 환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잊혀가는 기억을 스스로 붙들 방법을 찾았고, 그 방법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하루하루 실행에 옮기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다. 단 하루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멸망시킬 수 있고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다."
소포클레스


가끔 멍하니 보낸 나의 하루가 누군가의 노트에 의미 있게 빼곡히 적히게 되는 간절한 하루라는 걸 되새기며, 나의 오늘도 행복하고 즐겁게 그리고 보람되게 보내야겠다.

이전 07화 이건 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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