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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이 Jun 18. 2020

아빠는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중

보호자가 된 의료인

엄마는 20대의 나이에 30대의 아빠를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두 딸을 낳아 육아에 몰두했다.
가끔 소일거리를 하기도 했지만 집안의 경제활동은 아빠의 몫이었다.
엄마는 직장생활을 오래 해 본 적이 없다.



엄마는 그 시대의 평범한 엄마들의 삶처럼 육아와 집안일을 담당했다.
엄마는 가족의 세끼를 차리고 치우는 일이 당연스러웠지만 요리에 취미는 없었다.
아빠는 엄마가 차린 식사보다 바깥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했고, 집에 오는 길에는 꼭 먹을 간식을 사 오셨다.
그것이 한때는 엄마를 섭섭하게 하기도 했지만 엄마의 삶을 보다 더 편안하게 해주기도 했다.
엄마는 간식거리를 챙길 일이 적었고 외식을 하는 날은 주방 일에서 해방됐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엄마는 운전면허를 땄다.
엄마는 우리의 등 하원을 책임졌고, 마트나 백화점 목욕탕에 가는 등 가까운 거리는 혼자서 운전을 했다.
워낙 바깥 외출을 즐기지 않는 엄마는 자차로 운전이 가능한 활동반경에서의 생활을 즐겼다.
장거리 이동할 일이 있을 시에는 아빠가 엄마의 이동을 도왔다.
엄마는 대중교통과 친숙하지 않았다.



집안의 대소사는 아빠가 처리했다.
이사를 할 때, 집안의 경조사 등의 모든 과정은 아빠의 손에서 해결됐고 전구 갈기, 샤워기 수리 등 자잘한 집안일도 아빠의 몫이었다.
엄마는 그 편리함을 잘 알지 못했다.
그 모든 과정을 처리하는 것은 그저 아빠의 일이었다.
그것이 엄마에게는 너무도 당연했다.



엄마는 물건 정리를 체계적으로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반면 아빠는 한번 놓은 물건은 다시 꼭 그 자리에 두신다.
우리도 물건의 위치를 아빠에게 묻는 것이 익숙하다.
"아빠 건전지 어디있지?"
.
.
.
.
.
며칠 전 엄마는 입원해 계신 아빠의 면회를 다녀온 후 나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 아빠가 나를 훈련시키는 중인 것 같아.
- 응?
- 내가 세상에서 더 단단해지라고, 몰랐던 것을 배우라고, 혼자 헤쳐나가는 법을 익히라고 지금의 이 시간을 나에게 준 것 같아.



엄마는 아빠가 입원하고 비로소 아빠의 빈자리가 주는 무게를 경험하고 있다.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것도 새로운 장소를 혼자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잘한 물건들의 위치를 알지 못해 답답했다.
집에 먹을 간식이 두둑하게 없다는 것도 어느 날 문득 엄마를 슬프게 했고, 아빠가 벌어다 주는 돈의 가치가 이렇게 큰 것이었던가 새삼 느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간호학에서는 인간의 스트레스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많이 이루어진다. 스트레스를 공부하며 인간이 겪게 되는 스트레스 중 그 무게가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공부한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배우자와의 사별이다.



아빠가 완치 불가능한 질병을 진단받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늘 불안하고 슬프게 했다.
아빠의 부재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특히 엄마가 그 스트레스를 잘 이겨나갈 수 있을까 걱정됐다.


하지만 엄마는 지금 이 힘든 상황에서도 이 시간이 주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엄마는 최악의 상황이 오기 전에 지금의 시간들을 통해, 아빠가 엄마 혼자 세상을 살아가기 부족함 없이 단련되도록 성장하는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아빠의 부재가 엄마의 삶 속에서 한 순간의 큰 충격이 되지 않도록 엄마는 지금부터 아빠의 부재로 인한 엄마의 삶 속의 구멍들을 스스로 조금씩 메꿔나가고 있다.


아빠는 지금까지 약 1년 동안  힘든 치료를 견디고 계신다.
엄마의 말처럼 아빠가 그 시간들을 견디시며 우리를 이 상황에 적응하도록 훈련시키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빠 없이 이사 준비를 하고,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엄마의 노후계획을 고민했다.



아빠는 계획적이고 꼼꼼하고 침착하며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아빠의 성향이 아빠의 인생에 녹아 마지막까지 우리의 삶 속에 지혜를 주고자 하시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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