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해마 이야기> 에릭 칼 / 김세실 역
좋은 아빠일 것 같지 않은가?
그렇지. 글 속에서 나는 아이와 항상 놀아주고 함께 걷고, 그림책 읽어주는 좋은 아빠겠지.
자상한 남편일 것 같지 않은가?
그렇지, 글 속에서 나는 사려 깊고 바다 같은 이해심을 보이고 있겠지.
아이가 태어난 순간을 같이 맞이한 이후 언제나 육아를 함께 하며 아내를 도왔을 멋진 신세대 남편이겠지.
피곤한 아침 출근길을 마다하고 잠자리에서 새벽 수유를 도와주었을 것이고
기저귀 갈이를 가끔 맡아주었을 것이다.
젖병 소독과 설거지를 도와주었을 것이고
진공청소기도 한 번씩 돌렸을 것이다.
아내가 식사할 때는 아이를 잠시 도맡기도 했고
밖에 나갈 때는 유모차를 끌어주고
아이가 아플 때는 운전을 맡아 한밤중을 달렸을 것이다.
퇴근 후 아이와 둥게둥게도 해 주고
밥 먹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림책을 읽어주고 머리맡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를 재우는 걸 도와주었다.
어린이집의 등원도 때론 시켜주고 하원을 도와주기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같이 참석하여 사진도 찍어주고 말이다.
내 세대가 옛적 아부지들과 선을 긋는다면 이 정도 가정적인 아빠의 모습은 표준 정도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름 남들보다는 육아에 참여한다는 자부심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그 가소로운 착각은 아내가 시름시름 시들어 꽃잎이 떨어질 지경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었다.
어는 날 아내는 그야말로 폭발을 했고, 우리는 대판 싸웠을 것이다.
나는 나 대로 이것이 꽤 억울했는데, 나름대로는 그래도 최대한 아내를 도와 육아를 했다고 생각했기에 말이다. 다른 어디에 가도 자상한 남편으로 으쓱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말이다. 아내는 육아에 한없이 수동적인 내가 절망스럽다고 했다.
‘너는 한 번도 주도적으로 육아를 하지 않았어.’라고 절규했다.
아내는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과 동일한 분신처럼 아이를 돌보았다.
두세 시간밖에 못 자며 뜬 눈으로 수유를 했으며
진새벽에 울고 있는 아이를 어찌해도 달래지 못해 함께 울었다.
육아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일일이 인터넷 후기를 대조해 가며 구입했으며
체온계, 해열제, 삐뽀삐뽀119 등 아이가 아플 것을 대비한 모든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아이에 맞는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레시피를 숙지하고 재료를 쇼핑하고 소분했으며
아침, 점심, 저녁, 간식을 어떻게 하면 영양을 맞추어서 준비할까 고민하며 요리했다.
자면서도 항상 아이 체온이나 숨소리를 확인하곤 얕은 잠을 잤으며
동네 소아과와 응급실 전화번호를 찾아 메모해 두었으며
영유아검진과 예방접종을 일일이 확인하고 일정을 잡았다.
백일 사진, 돌잔치를 위해 필요한 기획을 도맡아서 처리해야 했으며
양가 부모님들께 수시로 사진도 보내고 한 번씩 애기 얼굴도 보여줘야 했다.
좋다는 그림책을 일일이 수소문하여 구입했으며
아이가 좋아할 만한 아동극, 여행장소를 리스트업하여 주말 계획을 짜기도 했다.
아토피가 번져가는 피부에 좋다는 약이며, 음식이며 물어물어 찾아다녔다.
아이가 커가면서 필요할 책상, 의자, 액세서리를 하나하나 대조해 가며 준비했으며
어떤 어린이집이 적절할지 확인하고 원장님 면담도 했으며
날적이를 적어 가방에 넣어두고 등원 전 아이의 옷이며, 가방이며, 수건을 챙겨 두고
기본적인 등원과 하원은 아내가 도맡았다.
주변 초등학교를 알아보고 입학절차를 처리해야 했으며 선생님 면담을 하고
가정통신문을 읽고 준비물을 가방에 챙기는 것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리고,
비상연락망에는 언제나 아내의 전화번호가 기재되었으며 무슨 일이 있으면 회사에 사정을 얘기하고 어린이집과 초등학교로 달려가야 했다.
무슨 얘기냐면 나는 한 번도 육아에 주체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육아 코스프레를 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 잘 도. 와. 주. 었. 다.
한 번도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아내가 전업주부인가? 천만에. 나와 동일하게 출근하고 퇴근하는 회사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회사일과 더불어 모든 육아를 주도적으로 진행해야 했으며 나는 차암 잘 도와주었다.
흔히들 인생에 연습이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인생에서 연습이 없이 훅 다가오는 절망을 느끼는 데는 육아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아내 또한 서투른 자신을 보며 얼마나 자존감이 떨어졌겠나. 하지만 엄마는 이를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간다. 지켜야 할 대상이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나는 피를 묻히지 않고 적당히 우아하게 춤추고 있었다. 나름 숨을 헐떡이며 그 땀의 나르시시즘을 흡족해하며. 그동안 아내는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던 것도 모르고 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한 문장들을 읽어보라. 나는 항상 선심을 쓰는 척 도와주었고, 가끔씩 무언가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특히 나는 한 번도 직접적으로 선생님으로부터 아이에 대한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 비상연락망에는 아내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으니까. 나는 이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무엇을 깨달았을까? 관성의 법칙을 거스르고 조금은 달라지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너무도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지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아내는 육아를 하면서 시들었던 시절이 있었으며, 가슴에는 깊은 골짜기에 못이 박혀 버렸다. 과연 회복될 길이 있을까? 그렇지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빠른 법이다.
그 이후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던 것 같다. 관찰자와 참여자가 아니라 내가 주도로 육아를 캐어하고 아내를 참여자로 둘 수 있도록 의도적인 흉내를 내려했다. 그 서투른 행동들이 아내에게 얼마나 서툴고 가소롭게 보일지는 알지만 노력을 하려 했다. 적어도 내가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는 깨달음과 아내는 아팠다는 과거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금술이?
뭐 이런 과거 실수담을 스리슬쩍 적는 것을 보아서 해피엔딩으로 오순도순 살고 있다고 얘기하면 거짓말이다. 아내는 아마 오뉴얼 한 서리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이십 년 후 용서할 때까지 빌어야지 뭐. 그래서 늙어 따순 밥 먹기는 틀렸다는 자각이 있어 직접 요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요즈음이다.
저기… 그런데 그림책 얘기는 언제 나오나요?
<별책 부록>
그런 티격태격 육아의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아이는 어느 순간 홀로 자란다. 그림책의 말미에 담긴 코멘트처럼, “하지만 이제부터는 네 힘으로 살아가야 해.”
그런 시간이 다가오기는 하는구나 싶다. 저 바람둥이 컨셉의 세르쥬 갱스부르가 들이대는 영국 소녀의 나이도 어느새 훌쩍 지나가는 것이다. 그림책을 읽으며 지난 육아를 생각하고, 아내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새삼 아이가 이렇게 커버렸다는 생각이 말미에 글을 타고 스며든다.
아내도 그렇지만 문득 그 시기를 함께 지나 온 아이도 고맙고만. 앨범을 듣고 있으매 개망나니든 모범생이든 뭐든 신경 안 쓸 테니 너만의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아 내길 바래 본다.
Serge Gainsbourg [Histoire de Melody Nelson] 1971년 <Melody>
https://youtu.be/OXUrl3fGknM?si=iPhZ8jJFNSJCo-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