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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Apr 18. 2024

선생님 저는 바빠요 이만

 <지각대장 존> 존 버닝햄

멋지다. 흠.

앨범을 탁 듣고 ‘이건 내게 명반이야.’라고 단언할 수 있듯, 그림책을 탁 덮고 ‘이건 분명 명작이다.’ 고 판단했다. 고개를 갸웃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컴퓨터로 달려 나가는 아빠를 보고 아이는 멀뚱멀뚱, 아내는 또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다.

영국의 유명한 3대 그림책 작가라고 한다. 역시 그러하군. 3대이든 말든 자신에게 스며야 하겠지만 깜짝 놀라서 이력을 찾아본 작가이다. 명불허전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말이렷다. 벌떡 일어나 끄웨에에엑 소리를 지르기 전에 아내는 이미 그의 또 다른 저작인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를 장바구니에 넣는 중이다.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어 맛있는 성찬을 먹는 느낌이다.

그림책은 반복으로 진행되는 패턴을 잘 활용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모든 아이는 반복을 좋아한다. 그 속에서 어떤 리듬을 느끼고 조금씩 변화되는 변주를 즐긴다. 그리고 마지막에 어떤 해소과정을 넣으면 이야기는 꽤 풍성해지고 우리는 만족감을 얻는다.

그림책은 또한 어렵지 않은 수많은 은유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어른들을 자극하는 좋은 거리이다. 아이에게 책을 읽혀주다 자신이 반하기에 적절한 것이다. 아이들 또한 이 은유의 상세한 해석은 신경 쓰지 않더라도 까닭 모를 어떤 통쾌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존이 학교를 간다.

등굣길에 고난을 만난다.

해결하나 학교에 지각한다.

선생님은 지각한 이유를 거짓말로 치부하고 더 큰 체벌을 내린다.


그림책은 우리의 소년 존이 서둘러 학교를 가기 위해 동이 터 오는 들녘을 열심히 걸어가는 롱 샷으로 시작한다. 이는 네 번 동일하게 반복되는데 매 회 색깔과 풍경, 그리는 방식이 다르다. 유추해 보건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 생각되기도 하고 매 순간 달라지는 아이의 성장, 마음을 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는 똑같은 시간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역동성을 유화에 스크레치를 남기는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기본적인 반복 패턴을 통해 우리는 존의 억울함을 대신 느끼고, 그럼에도 꿋꿋이 문제를 해결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주인공에게 서서히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데.


존은 매 번 특정한 고난을 만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하여 이 상황을 이겨내지만 그 때문에 지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의 위기 극복 능력을 칭찬하기는커녕 거짓말쟁이로 몰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혹독한 체벌을 진행한다. 주인공은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느 학생으로 대입해도 될지 모른다. 어떤 일이 닥치지만 나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아이들 말이다. 하지만 공교육이라 상징되는 선생님과 어른들은 이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들 세계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복을 입은 판사와 같은 모습으로 선생님은 연단에 서서 존을 판결한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라고 풀 네임으로 학생을 부르며 재판을 시작한다.

이 동네 하수구엔 악어 따위는 살지 않고

이 동네 덤불엔 사자 따위는 살지 않고

이 동네 강에는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치지 않는다고

철저히 갇힌 사고로 재단한다.

사실 당신이라도 이를 믿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존이 실제로 이런 말이 안 될 것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을 목도하였다. 그래서 이게 거짓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우리가 선생님 같은 입장이라면? 과연 진짜 아이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더욱 은유를 자극했다고 생각한다. 즉, 어린이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어른이 재단해 놓은 세계와의 간극이 이다지도 아득함을. 사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우린 미운 다섯 살, 사춘기 등의 이름을 붙여 마지못해 인정하는 척은 해 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존중해 주어야 마땅할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 있어서 또 다른 주목할 점은 아이의 표정이다.

이는 거의 무표정에 가깝다. 이게 얘가 지금 위기의 상황인지 극복하려는 순간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 심지어 선생님에게 혼구녕이 날 때도, 체벌을 받아 벽을 보고 400번 외칠 때도 표정은 동일하다. 일전 백희나 <어제저녁>을 얘기할 때도 그랬지만 표정의 최소화가 오히려 감정을 이입하기 쉽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대신해서 감정을 느끼는 내가 있다. 또한 달리 보자면 깜짝 놀란다거나, 당황하거나, 풀이 죽는다거나, 그런 것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는 단지 의연하다. 어른들만 그들의 세계에서 재단하지 못해 난리도 아닌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늘도 존은 학교를 가는가 보다. 결국 그는 우리가 모르는 큰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의 꾸중 따위, 작은 난관 같은 것으로 일희일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도 같다.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게 있어요.’ 꼭 그렇게 몸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우리는 무심히 제 갈 길을 가는 아이에게 큰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본 그림책에는 어떤 통쾌함이 있다.

아마 아이들은 백이면 백 이런 권위적인 선생님과 부모님이 곤경에 처하는 상황이 된다면 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제재와 체벌에 익숙하지 않은가.

혹시, 당신은 아이들이 의외로 부모가 잘못하고 곤란해하고 있을 때 좋아하는 것을 아는가?

‘어, 왜 안되지?’ 그렇게 난감함을 표시하고 있으면 아이들은 스을금 다가온다. ‘으휴, 이것도 못해?’ 그러며 도와주러 오는 것이다. 그리고 꽤나 뿌듯해하는 것을 느껴보지 않았는지? 우리는 잘 난 부모가 되어야 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서 아이는 오히려 숨 막힘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부모란 잘 난 사람뿐 아니라, 실수도 곧질 하고 때로는 자신이 도와줘야 하는 빈틈이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게 교육적으로도 더 좋지 않을까 혼잣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결국 이 그림책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정서적인 폭력과 소통 불통에 대해 작가 나름의 방법으로 엿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는 아마 존 버닝햄 작가가 부적응으로 9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니고, 마지막에 섬머힐 학교에 진학하여 대안교육을 받았던 자전적인 영향도 있지 않을까 판단한다.

이 그림책이 나온 게 1987년이다. 그리고 영국이다. 그렇지만 이게 책장 속의 이야기, 남의 나라 이야기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대한민국에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왜 슬픈 옛이야기는 변하지 않고 재생되어야 하는지, 무거운 책가방을 지고 걸어가는 학생들의 실루엣에서 오늘도 씁쓸함을 곱씹을 뿐이다.





<별책부록>

공교육에 대한 작가 자신의 부정적인 마음도 이해한다만 이 영국이란 나라가 과거 교육적으로 막힌 면이 많았었나 보다. 사실 그 시기면 한국 또한 더했으면 더했지.

이 그림책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대번 떠오른 음악은 단 하나였다. 그 싱크로율이 거의 형제 같은 지간이니 말이다.

Pink Floyd 핑크 플로이드는 본 그림책보다 8년 앞서 1979년에 발매한 [The Wall] 앨범을 통해 동일한 뉘앙스로 교육을 대차게 비판했었다. 앨범은 후에 앨런 파커 감독의 연출과 앨범 전체 수록곡의 삽입으로 거의 뮤직비디오에 버금가는 영화로도 제작이 된다. 그러하기에 <Another Brick in the Wall>은 충격적인 영상과 더불어 뮤직비디오의 전설로 봐도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외침들은 훗날 한국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로 계승된다.



Pink Floyd 1979년 [The Wall]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

https://youtu.be/K6PwUG283DU?si=LqhJqfXTQYsXdj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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