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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Jun 11. 2023

친구, 나의 장례식에 들려주어

이병우 <어느 기타리스트의 삶>

‘진공 새벽’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언제부터 썼던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의 새벽 공기를 표현하는 말 이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색깔은 확실히 푸르스름할 것이고, 간간이 지나가는 휑한 차량 소리, 가끔씩 멀리서 울리는 고양이 소리 외에는 세상 만물이 숨죽인 밤. 그 순간 만약 깨어 있다면 떠오르게 될 단상들.

그리고 그 시간대를 '진공 새벽'이라 칭했다.

숨 막힐 듯한 농밀함.

그리고 그 속에는 꼬드김에 부모 몰래 담 타 넘고 밖으로 나와 새벽 공기를 마시며 끝도 없이 주절거리며 걸었던 친구와의 기억도 자리한다.


그와 비슷한 마음으로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야간비행>을 읽었던 때는 공교롭게도 야간에 어떤 일이 있어 잠들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그 새벽에 읽게 된 작품은 시간의 공기까지 머금으며 마음에 크게 와닿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항공술도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오로지 조종사의 5감을 동반해서 몇 개의 계기판으로 운항해야 하는 시대,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 비좁고 좁은 콕핏에 앉아 외로움과 두려움을 극복하며 저 바다를 건너 다니며 우편을 배달하던 야간항공 비행사들의 심정을.

줄거리의 내용보다는 그 외롭고 두려운 공간에서 정말 홀로 극복해 내어야 하는 마음에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나 혼자 서야 하는 걸’ 이런 단상들…


여기에 마지막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를 삽입해 본다.

항공기를 정말 좋아했던 하야오 감독의 본성이 투영되어 있는 성인을 위한 은근한 은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시니컬한 돼지.

우아하게 독 파이팅의 궤적을 그리는 붉은 기체의 프로펠러 소리가 지나간 후 누구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파라솔의 그늘에 누워 지나간 과거를 관조하는 시간.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돼지는 날아도 돼지야’라는 친구의 툭 내뱉던 냉소.

그 속에 숨겨진 마음이 뜨거운 돼지, 그리고 유일하게 그를 이해하는 오랜 여인의 샹송 자락.


갑자기 세 가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미안하지만 이게 나에게 얼개가 맞기 때문이다.

진공 새벽의 기운과 그 속을 헤쳐가는 고독한 프로펠러 비행기, 그리고 시니컬한 붉은 돼지의 웃지 않는 미소.

여기에 하나의 앨범을 끼워 마지막 조각품을 맞춰보고자 한다.


 일전 ‘어떤날’ 2집을 소개하면서 https://brunch.co.kr/@b27cead8c8964f0/35 욕심을 피력했었다.

‘어떤날’ 활동 이후 이병우는 개별적인 솔로 앨범들을 소리소문 없이 한 장씩 차곡차곡 다져내었다.

기타로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마음들을 앨범들에 녹여내며 우리는 또 다른 시각에서 위로받곤 했었는데, 예를 들어 <머플리와 나는 하루종일 바닷가에서> 이런 즐거우면서도 처연한 풍경도 즐기고 말이다.

전문적인 기타 공부를 위해 오스트리아 클래식 기타 유학을 다녀온 이후 그는 보다 연마된 실력을 안고 앨범 한 장을 발표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네 번째 작품 [야간비행]이다.


B면은 유학시절동안 공부했을 것 같은 정통 클래식 기타의 연주를 담아내고, A면은 언제나처럼  그의 마음을 표현한 독특한 형식의 앨범이다.

전성식의 단단한 어쿠스틱 베이스, 신이경, 김광민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까지 지원하며 그의 마음을 풀어내고 있다.

플레이를 해 보면 클래식 기타로 아름답게 녹여낸 <꼬마 버섯의 꿈>의 소박함을 시작으로 앨범 속 동명타이틀 곡 <야간비행>이 이어진다. 그가 좋아 바라마지 않는 Pat Metheny 팻 메스니의 영향이 있기는 하되 ‘야간비행’ 이라는 테마에서 느낄 수 있는 스산함과 막연한 두려움, 그리고 이를 뚫고 흘러가는 새벽공기를 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오늘 한 곡을 꼽고 싶은 <어느 기타리스트의 삶>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어쩌면 그 어느 기타리스트의 삶이란 기나긴 터널 같은 야간비행을 지금도 통과해 내는 누군가일 수도 있고, 이미 모든 세파를 통과한 후 임종 직전 플래시 백으로 흘러가는 삶의 반추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되고 싶은 누군가의 마지막 모습 형상화일 수도 있겠다.

무엇을 상상하든 본 곡은 그 제목이 주는 무거움의 가치에 눌리지 않고 재즈 어법을 통해 소신 있고도 아름답게 표현을 해내고 있다. 김광민 아저씨의 깊은 피아노 울림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덤이다.

당신이 이를 듣는다면 어떤 상상을 하게 될까? 누군가는 자신이 죽은 장례식장에 조용히 울려 퍼지게 해 달라고 부탁할지도 모르겠다.

곡을 들어보며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어떤 곡이 자신의 장례식에 흘렀으면 하는지, 나는 어떤 삶으로 남고 싶은지...


네가지의 완성된 얼개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생뚱맞기도 할 것이되 어떤 놈에게는 그렇더라 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본 음악소개글을 빌미 삼아 별책부록으로 누군가의 삶을 기리고 광고를 덧붙여 이번 챕터를 마무리해 본다.



이병우 [이병우 4 야간비행] 1995년 <어느 기타리스트의 삶>  15분 27초부터

https://www.youtube.com/watch?v=fQKEF1reV-A&t=927



[별책부록] 본 글에는 광고가 있습니다.


김종철 아저씨를 좋아한다.

김민기 아저씨와 더불어 유일하게 존경하는 사람이다.

<녹색평론> 한아름을 안고 약간은 피로하게 미소 짓고 있는 100호 당시의 아저씨 사진이 생각난다. 아저씨는 이 작금의 파괴적인 시대가 화가 나서 글을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했고, 이것이 발현된 것이 <녹색평론> 격월간 잡지 내기였다.

그의 진정한 목표는 더 이상 <녹색평론>을 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는 것이었다. 1991년 첫 창간호를 발행했던 시간과 지금을 돌아봄에 계속 책을 내어야 한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던 것 같다.

사상의 가장 끝의 한편에 서서 지속적으로 폭력적인 서구 산업문명에 대한 토로. 지구 자체를 생각하는 확실히 급진적인 생태주의자일 수 있으되 그의 시선은 돌아보면 근본적으로 틀릴 게 없었다.

기후 위기가 이제는 범국가적으로 인정하는 일반적인 현재를 돌아보면 말이다.

가장 극단이 있으면 그나마 중간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총대를 맨 그의 헌신에 예의를 표한다.


1991년 창간호부터 2020년 5-6월 172호까지 29년 동안, 숙환으로 2020년 6월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도 한 번의 중단 없이 발행을 이어나갔다는 것은 고개가 숙여지는 일이다.

정말 <어느 기타리스트의 삶>과 같다.

그 <녹색평론>이 잠깐의 휴지기를 가진 후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시작의 자리에 섰다.

<녹색평론>은 편집의 독립성을 위해 광고 자체를 싣지 않고 온전히 독자의 정기구독, 후원에 의해 운영되는 출판이다.

잡지를 읽든, 읽지 않든 나에게는 작은 기부 같은 일이었고 지난주 다시 시작한다는 반가운 편지를 읽고 정기구독을 시작했다.   

비슷한 생각을 영위하는 분들이 있다면 한 명 한 명의 정기구독이 큰 동력이 될 것으로 믿는다.

http://greenreview.co.kr/



독자 여러분께


《녹색평론》이 다시 발걸음을 뗄 수 있도록 꾸준히 응원해 주시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안타깝게도 1년 남짓한 휴간기간은 안정된 잡지발행을 위한 환경을 갖추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모든 조건이 충족되길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다, 미흡한 모습이 부끄러워도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한 발짝이라도 떼어놓자고 생각했습니다.

《녹색평론》은 외부지원에 기대지 않고, 기본적으로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구독료에 의지해서 운영한다는 방침을 창간 이래 변함없이 유지해 왔습니다. 나날이 인쇄매체를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고,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서 이것은 순진하고 무모한 정책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 잡지가 미약하지만 고유한 목소리를 30년 동안 낼 수 있었던 비결이 거기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편집실이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서, 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방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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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1일

《녹색평론》 발행.편집인 김정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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