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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Jun 17. 2023

그대 모습은 미친 보라빛처럼

Jimi Hendrix  <Machine Gun>

또 나왔다. 끝판왕에 대해 끄적이기.

일전 Miles Davis 마일즈 데이비스 https://brunch.co.kr/@b27cead8c8964f0/17 와 Bill Evans 빌 에반스  https://brunch.co.kr/@b27cead8c8964f0/13 에 대해 무식하게 돌진하며 산화한 이후, 다시 수류탄을 안고 뛰어 들어가 본다.


이게 참 희한한 뮤지션이다. Rock 음악의 대양을 항해하다 보면 오만곳 안 걸치는 데가 없다. 좀 걷다 보면 툭, 좀 걷다 보면 툭 뭐 이런 식으로 숨은그림찾기 마냥 어딘가에나 숨어 언급이 되어 있다.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칭할 때는 거의 괄호 밖의 리스트로 취급되고, 수많은 이들에 의해 존경하는 뮤지션으로 찬양, 일렉 기타의 일대 혁명가, 기타 좀 치는 이들 중 영향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 등 그의 위대함을 얘기하는 추임새를 하나둘씩 접하자면 잭이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풍경을 잘 대변해 주는 게 이런 자켓이다. 어디에나 슬쩍 숨은그림 마냥 얼굴을 내밀고 있는.



어릴 때는 뭐 한다고 그렇게 유명하다냐, 부풀려진 것 아니냐, 일찍 타계한 프리미엄값 아니냐고 의심을 했었는데,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차분히 공부하면서 백이십퍼센트 인정할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혁명과도 같은 파도가 휘몰아쳤던 시간이 단 몇 년간 이루어진 업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대단하다고 느끼게 되고, 일면 안타까움 또한 동반하게 된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만들어 갈 음악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말이다, 예를 들어 동시대인인 Eric Claption 에릭 클랩튼 아저씨가 노익장을 과시하며 여전히 투어 공연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면.

그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단언컨대 수많은 굵은 발자취를 남겼을 것이다.

Rock 음악을 계속 새롭게 해석하는 작품을 내놓았을 것이며, 흑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정체성으로 Soul, funk 음악적인 접근도 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Miles Davis와 협연도 했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그의 기타는 재즈 어프로치도 충분히 취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상상으로 그치겠지만, 죽음이 어떤 프리미엄을 붙이지 못하는 실력 그대로의 뮤지션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의 역사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검색으로 충분히 많은 자료가 있을 테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얘기할 때는 최소 두 가지 방향으로 접근을 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음악 자체로서의 표현과 또 하나는 이를 리드해 나간 기타 사운드의 혁명에 대한 부분이 그것이다.


Jimi Hendrix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인이기는 하되, 그가 음악적으로 대중에게 콜을 받은 것은 영국에서부터였다. 그 인기가 대양을 건너 역으로 미국에서 환대를 받게 된 독특한 케이스이다.

이는 시대상과도 맞물려 있는데, 영국은 미국에서 건너온 블루스가 여러 초기 뮤지션들에 의해 이미 Blues Rock 블루스 락으로 발전이 되고 있었고 일반인들의 듣는 귀가 훈련이 되어 있었다. 이에 떡잎을 알아본 발 빠른 Chas Chandler 채스 챈들러라는 양반에 의해 영국으로 초청되어 뮤직 비즈니스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두 영국 연주자들과 함께 시작된 Jimi Hendrix 밴드의 전설은 Are you experienced? ‘니 이거 아나?’ 라고 대중들과 뮤지션들의 야코를 죽이며 시작된다.

그때가 1966년, 그리고 그가 타계한 년도가 1970년.

딱 5년의 시간이다. 그냥 미쳤다. 그 와중에 1967년 다시 미국에 돌아가 기타에 불을 붙여 화형식을 거행하며 미국 관객들을 완벽히 사로잡아 버리고, 3장의 길이 남을 음반 작업 후 Jimi Hendrix Experience는 해체, 군인이었던 시절의 옛 친구들로 결성된 Band of Gypsy 밴드 오브 집시의 결성, Woodstock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의 명연과 수많은 페스티벌에서의 활동 등 그 짧은 시간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융단폭격하듯 선사하고는 어느 날 휑하니 사라짐. 그리고 그 후 이어진 끝이 없는 유산들, 워너 비.


음악적으로 보았을 때 Rock&roll 락앤롤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고 블루스 락과 사이키델릭에 기반한 확장을 꾀했기에 당시의 시대상이 그런 장르의 초기 단계였다 하더라도 선구자 적인 음악을 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단순한 시대적 의의가 아니라 음악 자체가 좋기 때문에 회자된다고 얘기해도 무방하다. 4장의 앨범에 빼곡히 담겨 있는 음악들은 자체로서도 충분히 즐길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라이브에서의 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라이브 음악에서의 퍼포먼스, 연주가 더욱 그의 음악성을 표현해 주고 즐거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라이브를 보고 있자면 신들린 무당이 살풀이를 하는 무대를 보는 것 마냥 서서히 그의 명연에 입을 벌린 채 젖어들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뮤지션들이 기타를 연주한다고 하지만, 그의 연주는 기타 자체가 그의 몸의 일부분인양 인식하게 만들고 기타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소리가 표현된다고 느껴진다. 기타는 작은 제스쳐, 몸짓 하나하나를 표현하는 신체의 일부로 결합되어 마치 춤을 추는 무희와도 같다.

그 정점은 Woodstock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의 라이브 실황이다. 이는 앨범으로도 60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온전히 잘 녹음이 되어 있고 공연 실황도 비디오로 깔끔하게 촬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처음 Jimi Hendrix를 접하는 이들에게는 스튜디오 앨범이든 필요 없고 [Jimi Hendrix : Live at Woodstock] 본 라이브 실황을 접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CD도 있는데 빠진 곡들도 있고 그의 연주 퍼포먼스 자체가 하나의 음악 장르로 다가와 비디오 클립이 더 좋을 것 같다.

그가 새롭게 결성한 유닛인 Gypsy Sun & Rainbows 친구들과 함께 한 유명한 곡들의 퍼레이드, 기타와 한 몸이 되어 펼쳐지는 난장. 미국 국가를 기타로 찢어 발기는 음향 퍼포먼스...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두 번째로 그의 음악을 정의할 때 기타 사운드를 얘기해야 한다.

일렉트릭 기타가 내는 소리의 차원을 완벽히 확장시켜 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기타 사운드를 자신만의 무기로 만들어 줄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여러 조력자 또한 함께 했는데 중요한 것은 그가 이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했다는 것에 있다.

이는 시대상과도 또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운이 좋았던 것 아닌가? 그가 없더라도 언젠가는 나올 사운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운은 쓰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사운드에 대해 연구하는 스타일이었으며 오픈 마인드로 최신 기술을 아낌없이 실험하고 적용했다.


몇 가지 핵심적인 부분을 얘기해 보자면

첫 번째는 Marshall 마샬 앰프의 출현이 있다. 미국의 Fender 펜더 앰프에 대항하여 시작된 영국의 Marshall 앰프는 1964년 John Mayall & the Bluesbreakers 존 메이올 & 더 블루스브레이커스 앨범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1966년 Jimi가 대중에게 드러났을 때 그는 처음부터 이 신생 Marshall 앰프를 사용하며 커리어를 시작했고 그 새로운 앰프의 다이나믹한 사운드를 자신의 사운드 정체성으로 확실히 흡수한 것이다.

이후 Marshall 앰프의 승승장구는 모든 기타리스트들이 잘 알 것이다.


두 번째는 feedback 피드백 사운드가 있을 것이다.

피드백은 마이크와 스피커의 위치가 적절하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하울링과 비슷한 원리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이 기타 줄을 진동시키고 이 픽업으로 들어간 진동이 증폭되는 무한 루프에서 발생하는 기술적인 에러이다.

본 에러를 음악적으로 적극 차용하여 긴장감 조성, 폭탄 날아다니는 소리, 잔향이 주는 음악적인 쾌감 등 수많은 곳에 사용을 하였다. 이 피드백의 발견은 1950년대 말 다른 기타리스트에게 있으되, 이를 음악적으로 적극 활용한 이는 Jimi였기 때문에 피드백 사운드의 시작은 그가 원조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세 번째는 이펙터의 적극적인 사용을 통한 사운드 연구에 있다.

이 또한 그에게는 좋은 시절이었다. 새로운 기타 이펙터가 바야흐로 하나둘씩 개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새로운 기술의 일선에 있었으며, 여러 가지 다채로운 이펙터의 사용은 그의 음악이 수많은 형태로 진화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가 만들어내는 사운드 풍경에 한계를 없애 버린 것이다.

대표적인 이펙터를 보자면 우선 Fuzz 퍼즈가 있을 것이다.

Fuzz는 현대에도 복고풍의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에게 많이 활용되는데, 음향적으로 볼 때 파형의 경우 거의 플랫 한 각진 형태로 변형이 되며, 원 Hz가 있으면 이를 바탕으로 추가 하모닉 Hz를 겹겹이 배치하는 효과를 보인다. 왜곡을 하여 추가 Hz를 얻는 Distortion 디스토션 이펙터와는 또 다른 위상을 보이는데 쉽게 보자면 겹겹의 음으로 인해 소리가 지저분해지는 것이다.

이 Fuzz 이펙터는 초기 모델에서 발전하여 그가 1966년 커리어를 시작할 그때 바로 시장에 개선 모델이 선보이게 되었는데, 그는 이것을 운명처럼 처음부터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이 Fuzz tone은 Jimi Hendrix 기타 사운드의 중요 부분을 담당한다. 그가 Roger Mayer 로저 메이어라는 음향 엔지니어를 만난 것도 정말 중요한 행운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생소한 이펙터 시장에서 여러 장치들을 실험 중에 있었고, 그가 Jimi를 백스테이지에 만났을 때 프로토타입 Octave fuzz를 건네주어 테스트를 해 보게 했다거나 그를 위한 사운드를 위해 별도로 회로를 개조해 주었다거나 하며 사운드의 숨은 병기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사람의 와우와우 음성을 닮은 듯한 Dunlop사 Cry Baby Wha 와우페달 이펙터의 사용 또한 그가 적극적으로 사운드의 지평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대표적 표현법이다.

이 물건은 또한 1967년에 나왔다. 정말 적절한 시간적인 타이밍이 아닌가 싶지만 이를 그만큼 적절하게 음악의 자양분으로 차용했던 이가 있을까 싶다.

어떻게 밟아주는가에 따라 주파수가 변화하기 때문에 그가 한 발을 페달에 딛고서 흥얼흥얼 거리며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소리가 그의 몸 깊은 곳에서 나온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 외, Uni-vibe 유니바이브를 사용한 파도가 일렁거리는 꿀렁꿀렁 코러스 사운드를 Fuzz톤과 잘 버무려 사용한다거나 , 1968년 Guild사 페달 Foxey lady로 또 다른 Fuzz톤을 만들어 본다거나 여러 가지 그가 애용한 무기와 톤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이펙터가 나오는 족족 이것들은 어느새 Jimi의 손에 가 있었고 가장 일선에서 자신의 사운드에 버무려갔으며, 이는 모두에게 충격과 더불어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참 재미있는 것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가 Jimi Hendrix에 현재 진행형으로 영향을 받고 있고, like Jimi처럼 연주하려고 하지만 결코 그만의 개성 있는 사운드를 모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저 높은 곳에 놓여 있는 우상 마냥 범접할 수 없는 고전 예술 작품과 같다.



왜 수많은 뮤지션들이 약물 중독으로 생을 마감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한순간에 거대 음악 비즈니스에 노출되었을 때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Jimi 또한 너무도 빠르게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비즈니스 관계자들은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젓는다지만 너무 빠른 속도는 탈이 나게 마련이고, 뮤지션들은 그 스트레스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풀고자 했을 것 같다.

1969년 Experience 밴드가 해체된 이후, 그는 군복무 시절 함께 했던 흑인 친구 두 명 드럼의 Buddy Miles 버디 마일즈, 베이스에 Billy Cox 빌리 콕스와 Band of Gypsy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옛 친구들과 함께 해서였을까. 음악은 좀 더 funk하고 소울풀하게 흥겨운 느낌이다. 그가 이 체제로 친구들과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해 보려는 찰나,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달이 난 것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순간이다.

그는 1970년 이 새로운 밴드 체제로 데뷔 무대를 선보였는데 역사적인 그 녹음이 오늘 마지막 켠에서 한 곡으로 발췌하고 싶은 싶은 앨범인 [Live at the Fillmore east]이다.


앞서 언급한 Fuzz톤, 와우페달, uni-vibe의 코러스, 피드백 표현 등이 망라되어 집약되어 있다.  

베트남 전에 대한 명백한 반대, 그리고 현재 어딘가에서 전쟁 중인 군인을 기리기 위한 반전음악의 걸작이다.

전율이 흐르듯 방공호의 공습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면 여기는 어느새 전쟁의 한복판.

기타와 드러밍으로 표현된 머신 건의 총소리, 공연장을 가득 매운 피드백은 사방으로 날라다니는 포탄으로 화하고, 폭격의 충격으로 나뒹구는 잔해들, don’t shoot, don’t shoot him down.

시간을 초월하는 명백한 결론, ‘고전은 아름답다’란 명제를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휴,

아는 친구가 <Little Wing>을 연주해 준다.

날아라 날아라 하며 감칠맛 나게 표현을 해보려는 데 쉽지는 않은가 보다.

그 맛내기가 관건인 모양인데 그래도 좋다.

고개를 한데 척 꺾고 구성지게 노래까지 흉내내어 본다. 미소가 지어진다.

저기 저 사진 속의 아이는 꿈을 먹고 자라 <Still got the Blues>를 작곡하게 되고, 바다 건너 이탈리아의 어느 친구는 그를 기리는 곡을 연주하기도 하고, 내 친구는 오늘도 서투른 <Little Wing>을 맛내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수류탄을 안고 전장으로 들어갔다 살어는 나온다. 다음 글을 쓸 수는 있겠다.



Jimi Hendrix Band of Gypsy [Live at the Fillmore east] 1970년 <Machine Gun>

https://youtu.be/V7TxGJyfeXk?si=cRdaGNN1GftTiY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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