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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Sep 01. 2023

우아한 궤적을 그리는 안타

루시드 폴 <나의 하류를 지나>

‘에이징 커브’ 라는 전문 용어를 들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안티에이징이란 화장품 용어로 충분히 잘 알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에게 통용되는 것으로 어떤 시점까지 최고 기량을 보이다가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능력이 쇠퇴하는 정도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용어를 특이하게 프로게이머의 에이징 커브를 논하는 장에서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스타크래프트의 경우는 전체를 읽어내는 판세뿐 아니라 전광석화 같은 빠른 손놀림도 필요하기에 10대 후반-20대 초반에 이미 에이징 커브의 쇠퇴기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프로게이머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철권의 무릎은 30대 후반인데 에이징 커브론을 무색하게 끊임없이 노력하며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등등으로 마감하는, 그런 훈훈한…


에이징 커브란 용어가 신체적 능력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예술인에게도 가장 고민스러울 지점이 이 에이징 커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들에게 부여된 게 신체적 능력의 쇠퇴는 아닐 테니, 결국 정신적 쇠퇴, 감성적 노화가 이에 들어맞지 않을까.

사실 예술인에게 부여된 이 기대는 가혹한 것이긴 하다.

예를 들어 야구에서 타자는 3할만 쳐도 엄청난 커리어의 선수로 대접받는다. 열번 나오면 일곱번은 별 힘도 못쓰고 헛쓰윙, 스트라이크 아웃에, 내야 땅볼인데도 불구하고 최고로 인정받는다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로는 예술인의 작품에 대해 몹시 가혹하기도 하다. 기대가 큰 만큼 그만큼 바라게 되는 반작용이 타율 눈높이를 엄청나게 올려 버린 것인지도….

사실 내 얘기이다.

나는 좋은 소비자가 될 자신이 있기 때문에 열린 마음으로 예술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리고 그 보답을 받았을 때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지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 과도 같다. 아주 깊은 기대치로 다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열렬히 지지하고,

또 기다리고 지지하고.

또 기다리고. 갸우뚱,

또 기다리고. 흠

마지막 한 번만 더

아무래도 우리 사이는 이만인가 봅니다.

단순한 예의만을 남기고 돌아서 버린다. 좋아한 만큼 기대한 애정이 크니 에이징 커브의 가장 높은 곳의 정점을 끊임없이 강요하게 된다.

에이징 커브란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사물의 진리 같은 것이 아니겠나. 어찌 최고의 피크를 유지하도록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열역학에도 위배된다.

더군다나 예술인은 부단히 자신을 단련하고 세상을 그들 만의 필터링으로 받아들이며 우물이 마르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고갈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는 0.1할 타자일지언정 정말 대단한 거예요. 그런 것인데….

안타를 친다는 그 찰나 자체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을 것인가… 단 한 번이라도….

니는 단 한 번이라도 연탄 발로 차 본 적 있느냐 이 말이다.. (응?)



루시드 폴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일말의 예의로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마다 플레이는 해보지만 두 번 찾아본 적이 없다.

2009년 4집 <레 미제라블>이후 갸우뚱하는 마음은 시나브로 커져만 갔고 작년 10집까지 발표한 꾸준한 창작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그에게서 더 이상 어떤 향기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이제 누구보다 잘 나가고, 잘 정돈되고 이쁘게 만든 곡들을 꽤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나의 귀는 마치 그의 노래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려버리는 것만 같다.

어째 그런 것인가…

음악을 소개하면서 서운한 소리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내게 다가왔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의 하늘을 기꺼이 보여 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 고마움만을 얘기하면 되는데, 이번에 기어코 슬픈 얘기도 함께 하게 되네.

나에게 그는 전형적인 에이징 커브의 뮤지션으로 남아 있다. 그 안타까움이 많이 크다.

정말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니 혹여 좋아하는 분들 오해 없길…


안타까운 푸념부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그를 주인공으로 세우려는 이유는 미선이의 <Drifting> 앨범과, Lucid Fall 루시드 폴 1집의 숭고함이 빛을 잃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칼로 베이는 감성’ 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루시드 폴의 1집을 플레이어에 걸면 어쿠스틱 기타 스트로크가 시작된다.

시린 귀를 스치듯 나에게 날아온 <새>에 대한 무심한 인트로는 8마디가 이미 지났는데도 전주가 끝나지 않는다. 생경한 낯선 풍경에 한번 더 귀를 다가가게 만드는 절묘한 지점이 있다. 마치 화자가 쉬는 한숨소리와 기다리는 주저가 그 더해진 마디에 남겨져 있는 듯. https://youtu.be/JhGPMqnZ71Q?si=jc2RThBIipJfKJN1

예를 들면 그런 식이다.

곡들마다 미세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세공된 작은 마음들이 가득하다.

작가의 마음과 청자의 마음이 공명하는 주파수를 느낄 때가 음악 듣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무엇보다도 <나의 하류를 지나>는 감히 판단하건대 그의 가장 빛나는 피크이다.

이 조용하고 읊조리는 특별할 것도 없는 곡이 소중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단순한 어쿠스틱 기타 사이로 작게 심어 놓은 그리움과 장치들은 눈이 부시도록 투명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눌러 새긴 노래는 그 어느 시어보다 시리기만 하다.

동남풍이 불면 친구가 동쪽에서 찾아오듯이, 스산한 가을 찬서리가 내리면 곡을 들어보고 싶네.

나는 이미 찾는 이 없는데 너는 기어코 나의 가장 낮은 자리를 지나가네.

이 표현할 길 없는 진한 그리움.

심지어 내겐 이 거대하게 다가온 마음을 연애 때 그녀에게 표현하고, 너의 하류를 지난다는 자세로 다잡곤 하였으니.

물론, 그 당시 임하기로 한 신념은 지금도 당연히 잘 지켜지지고있지고 있다. 아. 손이 왜 자꾸 미끄러…

얘기했듯이 찰나의 스윙만이라도 그렇게 멋진 궤적을 그리는 우아한 외야 안타를 안겨주었다면 커브를 들이대는 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도 일게 된다.

또한 일전 백현진이 얘기했듯이, 다시 돌아서라면 지독해서 그때 밖에 못 만드는 예술이 있을 것이다.

과연…흠.

남에게 안 좋은 소리를 했으니 악몽을 꿀 것 같다.




…귀는 마치 그의 노래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려버리는 것만 같다.

어째 그런 것인가…

잠결에 꿈속에서 번개처럼 들려오는 호통 소리가 있었다.

“그의 음악에서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눔아. 니 에이징 커브 때문이야. 이것아.”

순간 영화의 반전처럼 세상이 하얗게 보이고 과거에 지나왔던 시간들이 순식간에 나의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툴툴 데며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모든 필름이 지나갔을 때 나는 한없이 쪼그라 들어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루시드 폴 1집 2001년 <나의 하류를 지나>

https://youtu.be/6WDgfNJNutY?si=P8XPkOYlnM82w7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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