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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 Oct 12. 2022

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게 이토록 강력하게 저항할까요?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예상과 다르게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쟁으로 인해 장기전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왜 이렇게 격렬하게 저항할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라고 보시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이런 악연을 알려면 이제 800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그 당시에 '키예프 루스(879~1240)'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공동 조상의 나라입니다. 즉,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원래 하나의 나라, 하나의 민족(루스족)이었습니다.



(키예프 루스 공국 / 이미지: 나무위키)



그러다 1237년 몽골이 쳐들어 왔습니다. 이때 루스족들 안에서 둘로 나누어집니다. 한쪽은 지금 몽골에 항복하고 난 뒤 후에 힘을 기르자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항복 없이 무조건 싸우자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누어지게 됩니다. 전자는 지금의 러시아이고, 후자는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됩니다. 그 후엔 항복하자는 러시아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거쳐 러시아 제국(1721~1917)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867년 알래스카 조약 전의 러시아 제국 영토 / 이미지: 나무위키)



반면 우크라이나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결국에는 옆 나라 폴란드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우크라이나에서 한 인물이 나타나니 '보흐단 흐멜니츠키(1595~1657)'이라는 인물이 우크라이나에서 봉기를 일으켜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근처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 지폐에도 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 / 이미지: 네이버블로그)



그러나 힘이 부치게 되어 그래도 같은 민족인 러시아에게 구원 요청을 합니다. 이에 러시아는 도와주는 척하다가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와 나눠먹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배신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국토의 약 80%를 러시아가 차지한 뒤,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압 정책을 이어가게 됩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이민족보다 못한 대우를 했으며 우크라이나 어를 못쓰게 하는 등 문화 탄압 정책도 병행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우크라이나에서도 희망이 싹트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바로 러시아내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러시아 혁명(1917)입니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사건인 러시아 혁명 / 출처:네이버블로그)



러시아 제국의 멸망으로 우크라이나는 드디어 독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독립 후 4년 뒤 소비에트 러시아에 의해 수도 키이우가 함락되면서 그들의 염원은 다시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소련의 일원으로 그들의 명칭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 / 출처: 네이버 블로그)



소련의 일원이 된 우크라이나는 초기에는 소련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의 영향으로 그들의 언어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나름 초기 소련의 우호적인 '토착화 정책'으로 조금 나아지나 싶었지만, 스탈린의 등장으로 다시 악몽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집단농장화' 정책이라는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정책이 시행합니다. 당연히 대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그 결과 우크라이나에 35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되는 끔찍한 대기근 사태 '홀로도모르(1932-33)'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는데, 그 유명한 '체르노빌 원전사고(1986)'입니다.



(1986.4.26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최악의 원전사고를 규탄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 / 출처: 네이버 블로그)



러시아인에 의해 지어지고 관리되고 있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이후 대처가 지연되면서 피해가 급속도로 광범위하게 늘어났습니다. 우크라이나 땅의 오염과 우크라이나 인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마음에는 증폭된 증오심이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소련의 해체(1991)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 내에서 레닌 동상 철거 사진 / 출처: 네이버 블로그)



드디어 수백 년 만에 우크라이나는 국민 투표를 통해 독립국가로 태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은 약한 국력으로 언제든지 주변 국가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96년에 소련 시절부터 보유하고 있던 1800여 개의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국가의 안전을 담보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이 강대국 미국, 러시아, 영국 등이 서명한 '부다페스트 각서'입니다. 



(부다페스트 각서에 조인하는 각국 정상들 / 출처: 네이버 블로그)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이 각서로만 안심할 수 없어 확실한 보장책을 다시 강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나토 가입'입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나토 가입 기준에 미치지 못해 번번이 실패하지만 계속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NATO 헌장 제5조]

유럽이나 북미에 있는 어느 일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공격이 있을 경우 유엔헌장 제51조에서 인정한 독자적 또는 집단적 방위 권한을 행사하여 각 회원국들은 집단적 또는 독자적으로 공격받는 국가를 상호 원조한다.


위의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러시아 입장에서는 동유럽과 북유럽의 나토 가입 확대로 완충지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토의 군사력이 바로 러시아 본토와 밀착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다가 넓은 국토로 인한 완충지 역할을 나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된 러시아입니다. 결국 후방의 중국 눈치를 보면서 베이징 동계 올림픽 폐막 며칠 후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기에 이르렀죠.

사실 러시아는 수도를 빠르게 함락하여 친 러시아 정부를 세운 뒤 나토 가입을 철회시키려는 목적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의 강력한 저항을 미처 예상하지는 못한 듯합니다. 원래 역사적 가해자는 잘 잊어버리고 망각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뼛속 깊이 새기는 법입니다.  

이상 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이토록 러시아에 격렬히 대항하는지에 대해 역사적 고찰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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