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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

by 동틀무렵

우리 음식도 세계화가 되어가고 있다. 외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우리 음식이 비빔밥이라더니 또 김밥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구미를 당기고, 먹기에 간편해서인 모양이다. 이제는 유명거리에서 외국인이 국밥을 먹으려고 줄을 선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왠지 그 소식에 가슴이 휭 뚫리는 느낌이 인다. 그네들이 국밥의 감성을 얼마나 느낄 것인가. 거기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서정까지는 알지 못하리라.

국밥은 먹거리가 부족한 우리 민족이 갖은 재료를 모아 거기에 가장 흔한 재료로 양을 늘린 것이다. 그 흔한 재료를 ‘물’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국밥은 많이 가진 사람의 호사를 채워주는 고상한 음식이 아니며, 그러지 못한 뭇사람들이 골고루 먹기 위해 만든 음식이다. 그러나 국밥이 되기까지는 그 어떤 음식보다 긴 시간이 걸리는 간단치 않은 음식이다. 불을 늘렸다 줄였다, 하며 기다리는 시간은 하늘이 준 귀한 것을 받드는 의식과 같이 경건하며 그런 긴 기다림이 있은 다음에야 국밥이 된다.

국밥은 거기에 들어있는 재료의 정수(精髓)까지 알뜰히 훑고 뽑아 먹는 음식이다. 뼈다귀를 오래 끓여 뼈에 붙은 살점 하나, 힘줄 하나 살뜰히 뽑아낸다. 뼛속의 골수까지 우려내어 단단한 뼈마저도 구멍이 숭숭 나서 마침내 바스러지기도 하고, 푸성귀는 아예 용해되어 본디의 모습을 잃기가 일쑤이다. 그렇게 재료가 용해되어 국밥은 무거워진다. 재료의 근원까지 흡수하여 묵직해진 국물은 빛을 가두는 블랙홀처럼 열의 증발을 억누르고, 무거울수록 중력이 큰 물질처럼 국물이 마구 튀어 오르는 방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치 든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진중하고 말을 아끼는 것과 같다.

국밥의 본성은 그 뜨거움에 있다. 뚝배기에 푸짐하게 담긴 국밥 위로 피어오르는 증기가 그 온도를 대략 가늠케 해도, 기실 국밥은 뜨거움을 속으로 감추고 있어 뭣도 모르고 덥석 넘겼다가는 한동안 뜨거운 가슴을 부여잡아야 한다. 불같은 성정을 안으로 쟁여놓았다가 때가 되면 용암같이 분출하는 우리 민족과 닮은 데가 있다.

국밥은 차가운 겨울에 먹는 것이 제격이다. 뜨거운 국밥 한 그릇을 마주하면 한 잔의 술이 떠오르리라. 국물 한 수저를 떠 넣고 음~하며 마주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군가는 기어코 소주 한 병을 외치고야 만다. 안을 데워 밖으로 맺히는 이슬방울을 모아 한 잔의 술을 만들듯, 뱃속을 데워 밖으로 땀이 흐르게 하는 것은 뜨거움과 차가움이 만나는 조화이다.

국밥은 현란하지 않으며 투박하고 큰 음식이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끓여야 하고, 큰 그릇으로 먹어야 제맛이 나며 그릇에 넘칠 듯 담아야 한다. 칠 할쯤 채운 뚝배기를 마주하면 왠지 입맛이 달아나 버린다. 가득 채워진 뚝배기에 설령 주인의 엄지손가락 한마디가 빠진 채 내더라도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요, 탁자에 주발을 탁하고 놓을 때 국물이 넘치거나, 몇 방울이 옷에 튀어도 입맛을 다실 것이다. 그리곤 크게 한입 가득 넣을 것이다. 깨작깨작해서는 그 맛이 반감된다. 개화기 서양인들이 조선사람은 커다란 쇠숟가락으로 배가 터지도록 밥을 푹푹 퍼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느냐고 비웃었다지만, 국밥이야말로 한입 가득 채워야 더 맛이 나는 것이다.

건강을 염려하는 이들은 건더기만 건져 먹고 국물은 먹지 않는다고 하나, 나는 왠지 마지막에 그릇째 들고 시원하게 몇 모금 들이켜야 제대로 먹은 듯하다. 그래야 뱃속이 평온하게 정돈되고 스르르 내려앉으며 불끈 뜨거운 기운이 몸을 타고 내려간다. 양반은 그릇을 들고 먹지 않는다지만, 국밥의 마무리에서 근거도 없는 양반 타령과 채신머리 따위가 뭐가 중요하랴.

국밥을 국밥이게 하는 것은 토렴이다. 토렴이 없으면 국에 밥을 말아도 국밥이 되지 않는다. 젊은 시절 부산역 인근의 돼지국밥집에서 토렴하는 장면을 처음 보았더랬다. 토렴은 염색물을 다시 뺀다는 퇴염(退染)에서 따온 말인데, 어쩐지 뺀다기보다 밥알에 국물을 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온종일 끓어 순정해진 가마솥의 국에는 밥알마저도 ‘이물질’이다. 주인장의 현란한 토렴질로 국물은 밥알에 스며들고, 그런 연후에야 제각기 있던 국과 밥은 드디어 뜨거운 한 몸의 ‘국밥’이 되는 것이다.

화려함은 국밥집에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피맛골에 있던 백 년 해장국집도 허름했었다. 개발에 밀려 어쩔 수 없었다손 하더라도 깔끔한 신식 건물에 들어앉은 지금은, 맛은 그대로 일지 언정 기분은 영 아니다. 오랜 세월에 유리창이 바래어 간유리처럼 희부옇진 창문으로 속이 보일 듯 말 듯 하는 오래된 가게이면 더 마음이 끌린다. 그런 집이면 주인장 홀로 졸듯이 앉아있어도 괜찮다. 주방 안에서 무럭무럭 김을 올리며 끓고 있는 큰 가마솥만 보인다면 나는 기꺼이 드르륵 유리문을 열 것이다.

창밖으로 푸짐한 서설이 내려앉는 밤이다. 국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소주 한 병을 외치고 싶은 국밥의 계절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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