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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담, 벽

by 동틀무렵

강아지를 데리고 자주 가던 이웃 아파트를 들렀다 나오는데, 관리인이 뒤통수에 대고 여기 입주민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며 소리를 친다. 여태껏 그러지 않다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다. 그 얼마 뒤 반려견을 동반한 외부인은 출입하지 말라는 간판을 입구마다 세우더니, 심지어 뒷문에는 경비원도 없는 엄포용 초소까지 만들어 놓았다. 공동주거지의 넓은 땅은 늘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드나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말 없는 약속이 아닌가.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 법으로야 틀린 말은 아니겠으나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의 교실은 책상 하나에 두 명이 앉는 구조였는데 거의 모든 책상에는 가운데에 '금'이 그어져 있었다. 짝과 지내다 서로 토라질 일이 생길 때마다 그은 것이다. 그어진 금이 깊이 파인 것일수록 다툼의 빈도가 잦았다는 것이고, 삐뚤빼뚤 줄이 여러 개라면 영역 다툼의 심도가 깊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은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긴 하나 절대로 넘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으며 장난기가 숨어 있는 표식 정도였다. 팔꿈치가 슬쩍 넘어가거나 연필이 또르르 굴러 짝꿍 쪽으로 넘어가도 막힘이 없으니 있어도 없는 것과 한 가지였다. 그러다 큰 다툼이 있으면 중간에 가방을 세워 토라짐의 깊이를 선언하곤 했다. 가방을 올린다는 것은 표식에 불과한 금에 물리적인 제약을 주는 ‘담’을 세우는 행위이다.


그러나 담도 불가침의 영역은 아니다. 단지 외부인에게 마음대로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을 가볍게 알리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 조상님들은 담을 높이 쌓지 않았고, 길 가던 사람이 목을 길게 빼지 않아도 마당 안쪽이 훤히 보였다. 담의 안쪽은 주인의 것이긴 해도, 들어와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이 내재되어있는 경계였다. 그러기에 ‘지나가는 과객이 온데, 하룻밤….’을 청할 수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집도 매한가지였다. 대문은 늘 빗장이 풀려있거나 열려있었다. 삐걱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낯선 방문의 긴장보다는 어떤 기대가 일어났다. 멀리 강원도에서 말린 개구리를 꼬챙이에 꿰어 들고 대문으로 불쑥 들어오는 행상이 있었고, 꿀단지를 머리에 이고 들어오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네들이 마당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먼저 “우리는 안 사니더”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것은 먹는 것과 자식 교육 외에는 한 푼도 쓸 수 없다는 어머니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관용적인 말이었다. 그렇지만 방문객도 그 말에 바로 떠나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좀 쉬어가겠다며 툇마루에 털썩 앉아서는 하소연도 하고 같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이야기하다가 보면 그들이 떠난 뒤, 툇마루에 물건 하나가 남겨져 있을 때도 있었다. 한 번은 떡 장사에게서 보리쌀 한 되를 주고 공기 떡 몇 개와 바꿔먹은 적이 있는데,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하라는 어머니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지금도 생각난다. 집에 앉아 주전부리나 하는 것은 힘들게 일하는 가장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으리라.


이렇게 담은 낯선 이도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내가 젊었을 때까지도 그랬었다. 신혼 초 부산에서 살 때였다. 재첩국을 파는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 아내에게 밥 한 그릇을 달라고 청하더란다. 아내가 차려 준 밥상을 받고는, 관상을 좀 볼 줄 안다면서 부부가 여든까지 알콩달콩 잘 살 것이라는 덕담을 던지고 갔다고 한다. 퇴근하자 그 일을 전하는 아내가 괜히 더 예뻐 보였다.


담과 벽은 그 의미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담은 둘러쳐져 있어도 열려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가 살짝 보이기도 한다. 영역은 표시하되 열려있는 경계다. 벽은 제 쪽을 꽁꽁 감싸 안쪽이 보이지 않고, 주인이 열어 주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드나들 수 없는 닫혀있는 경계다. 따라서 상징하는 의미도 다르다. 벽은 그것이 가진 물리적인 의미 외에 ‘관계나 교류의 단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있다. 그래서 ‘마음의 벽’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의 담’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서로 마음에 앙금이 있을 때, 담쌓고 지낸다는 말은 관계의 단절을 영구히 한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다시 풀어지는 관계일 것이며, 벽 쌓고 지낸다고 한다면 이미 회귀가 불가한 절연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아파트에서 그렇게 한 후, 뒤이어 인근의 모든 아파트에 ‘외부인 반려견 출입 금지’라는 경고판이 세워졌고 오고 감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웃 간에 열려있던 담이 어느새 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파트라는 큰 공간을 어떻게 통제하겠다고 이런 불필요한 노력과 마음 불편한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가당키나 한 일일까?


담은 순우리말이고 벽(壁)은 한자어이다. 혹여 우리 민족의 심성은 본디 어울리고 열려있는 민족이라 서로 단절하고 산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기에, 벽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이 없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강아지 배설물이라는 소소한 문제로 열려있어야 할 담을 닫힌 벽으로 만든 세태가 참으로 씁쓸하다. 분명한 것은 강아지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오로지 인간의 문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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