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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을 베낀 녀석

by 동틀무렵

모방, 표절, 베끼기, 그리고 신조어인 ‘복붙’ 같은 단어들은 남의 것은 가져와 내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단어들은 의미가 모두 비슷하지만 각자 내포된 뜻에서는 그 어떤 진화의 단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나만이 가진 의미의 인식이며 느낌이다.


먼저 모방(模倣)이란 다른 것을 본뜨거나 본받는다는 뜻이다. 본받아 발전시킨다는 의미도 있으니 나쁜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도도 포함된다.

표절(剽竊)은 주로 음악이나 문학과 같은 예술 작품에 해당하는데, 남의 것을 몰래 훔쳐 자신의 것인 양하는 행위다. 이 단어의 ‘훔칠 절(竊)’에서도 그 뜻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 표절은 전체보다는 일부의 문장이나 음절 등을 베끼거나 약간 바꾸어서 제 것으로 하는 행위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아마도 음절(音節)의 ‘마디 절(節)’이 ‘훔칠 절(竊)’과 同音이어서 그런 느낌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십여 년 전에 유명 소설가가 타인의 문장 일부를 표절한 것이 드러나 작가 인생이 끝난 것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걱정말아요, 그대’, ‘님 그림자’도 한때 표절 논란이 있었다. 그때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는 없어서인지 표절이냐, 번안곡이냐 하는 논란이 있다가 흐지부지되었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은 전체를 베끼기보다는 일부를 가져와 조금의 손질을 한 것이다.

베끼기는 글이나 그림 따위를 원본 그대로 전체를 몽땅 그대로 가져온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베끼는 이의 나름의 수고(?)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따라온다. 이것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방학을 앞두고 학교에 불이 난 기억과 맞물려있다. 쟁여둔 방학 책이 거의 다 타버려서, 요행히 책을 받은 친구에게 책을 통째로 베껴 숙제한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베끼기라는 단어에서는 끙끙대면서 힘들게 노력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베끼기에서의 이런 느낌은 오래전 이웃에 살던 녀석의 일화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 지난 세월에도 잊히지 않은 것은 아직도 아내끼리는 먼 거리를 오가며 만나는 친분을 가지고 있어, 그럴 때면 가끔 그 이야기가 재생되기 때문이다. 녀석은 아들 친구의 동생으로 초등 2학년쯤의 좀 엉뚱한 녀석이었다. 녀석이 공부에는 요령을 자주 피웠기에 학습지의 문제를 풀 때는 엄마가 늘 지켜보았던 모양인데, 어느 날은 자기를 믿고 제발 나가 달라고 하더란다. 미심쩍었지만 하도 애절하게 간청하니, 답안지가 붙은 문제집을 주고는 방을 나왔더란다. 점수를 매기는데, 그날따라 하나도 틀리지 않아서, 의심이 부쩍 든 엄마가 “너 답지 보고 베낀 것 아냐?”라고 하니, 녀석은 펄쩍 뛰며 딱 잡아떼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지막 문제에서 이 녀석의 거짓말이 탄로 나고 말았다. 그 문제는, 예를 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쓰시오,’와 같은 딱히 정답이 없는 주관식 문제였고, 대개 '생략'이라고 답안지에 쓰여 있다. 그런데 이 녀석도 ‘생략’이라는 답을 써놓았다고 한다. 그 녀석 그날 많이 혼났다고 하던데, 아마 혼내는 엄마도 웃음을 참느라 매에 힘이 들어가지 못했을 것 같다.


꾀를 부려 엄마를 내보내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답안지의 답을 베끼는 녀석의 모습이 너무 귀엽지 않은가. 이 에피소드 때문인지 베끼기라는 단어에서는 어린애의 귀여운 속임수 정도의 느낌도 덩달아 따라온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복붙’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이것은 베낀 흔적을 없애려는 양심상의 작은 변형의 노력도 없고, 힘들게 노동해야 하는 수고도 필요치 않다. 단지 자판에서 몇 번의 클릭 질로 베껴 옮기면 되는 일이다. 다만 그 특성상 오로지 ‘글’이라는 것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논문 같은 지식을 훔치는 일에서 더욱 유용한 도구이다.


이 사회의 지도층들이 큰 모습으로 국민 앞에 설 때마다, 때때로 그들의 논문에 대한 표절 문제로 사회가 시끄럽다. 그나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문제가 드러나면 사과하고 물러날 줄은 알았는데, 지금은 그것쯤이야 하는 분위기다. 더구나 요즘 어떤 사람의 논란은 표절이라기보다는, 내가 갖은 단어의 의미 인식기준으로는 ‘논문 복붙’으로 부르는 것이 맞을 성싶다. 복붙에 얼마나 충실했기에 원본의 오타와 非文까지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 넣었을까. 더 가관인 것은 궁지에 몰리자 제자의 논문 자체가 원래는 자기의 것이었다고 하니, 이건 아예 원본을 가로채는 것이다. 이제는 남의 것을 가져오는 방법으로 표절, 복붙에 이어 또 한 단계 발전하여 ‘가로채기’라는 방법으로 진화하는 것일까.


지금의 참담한 논란을 보며, 남몰래 콧노래를 부르면서 ‘생략’까지 그대로 베낀 이웃집 녀석이 떠올라 혼자 빙그레 웃으며 잠시 더위를 잊었다. 그런 베끼기라면 애교로 봐줄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식을 훔치는 방법이 거듭 진화하고 독해지는 요즘 세상을 보고 있노라니, 무더위도 더 독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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