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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거리에서…

by 동틀무렵

1.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노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래위로 막 새로 다려 입은 듯한 옷매무새가 이 계절에 맞게 시원하고 깨끗하다. 얼굴에서 우러나는 세월의 흔적에서 노인이 상당한 교양을 갖춘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눈이 마주치자 노인은 “이런!”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의 허리 아래를 내려본다. 내 시선도 노인을 따라간다. 시선이 멈춘 곳은 흠뻑 젖어있는 회색 바지 앞쪽이었다. 언뜻 보아도 알아챌 만큼 젖은 부분이 넓게 퍼져있다. 길을 가다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한 모양이다. 노인은 또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지팡이에 의지한 걸음으로 급히 되돌아가신다. 노인과 눈이 마주친 것이 못내 죄송했다.


그러나 어르신. 민망해하실 필요 없어요. 십여 년 전 남미 콜롬비아의 대통령 후보는 대중 앞에서 유세하는 중에 바지에 소변을 흘렸답니다. 그의 바지가 서서히 젖어 드는 것을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았지요. 전 세계에 그 소식이 가십거리처럼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라며 떳떳하게 말했지요. 국민은 그를 인정했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게다가 훌륭한 정치를 펼쳐 50년간의 내전을 종식한 공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지요. 신체의 문제로 생기는 일은 실수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니 어르신, 절대로 민망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며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요. 아니 그렇게 되니까요.


2. 뜨거운 여름날이다. 뉴스에서는 연일 불볕더위라면서 오늘은 37도라고 한다. 담배를 피우려고 밖으로 나왔더니, 할머니 한 분이 회사건물 앞에서 내놓은 종이 상자를 정리하고 있다. 허리와 무릎이 매우 불편한 모양인지 아예 바닥에 엎드린 채 폐지를 간추리고 있다. 바닥은 40도가 훨씬 넘을 것이다. 늘 그렇게 일은 하는지, 아예 일 바지의 무릎 부근에는 헝겊이 겹으로 두툼하게 덧대어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안 그래도 담배 맛이 없는 날씨에 담배 연기가 더 입에 썼다.


서너 시간 뒤, 퇴근길에서 수레를 힘들게 끌고 가는 그 노인을 다시 보았다. 노인은 회사에서 1Km 정도 떨어진 큰길 언덕을 힘들게 오르고 있었다. 늦은 오후이지만 뙤약볕은 그대로다. 수레에는 폐지가 산더미같이 실려있다. 수레에 실린 폐지의 무게만큼 노인의 걸음은 느리고 힘겹다. 수레에 폐지가 수북한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수레가 가벼웠기를 바랬어야 했나… 어느 한쪽으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날마다 그렇게 힘들게 수레를 끌고 있을 노인을 지나치며 나는 에어컨이 시원한 바람을 뿜어주는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 강아지 산책 중이다. 고갯길 사거리 모퉁이 주유소 앞, 인도도 아니고 갓길도 아닌 어정쩡한 공간에 참외 장수가 노점을 펼치고 있다. 장사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는 좋은 자리가 아니다. 그전에는 가끔 꼬부랑 할머니가 양파나 고구마순 같은 채소를 팔던 장소인데, 오늘은 중년 아저씨다. 그늘도 없고 행인도 많지 않은 그곳에 수십 개의 참외를 봉지 봉지로 싸 놓고 하염없이 앉아 있다. 골판지에 적인 가격표에는 만원, 오천 원이라고 쓰여있다. 시멘트 바닥의 뜨거운 열기로 참외는 익어가는데, 저 참외들이 팔리지 않으면 어쩌나…. 모두 20만 원어치도 안 될 것 같은 참외는 줄어들지 않는다. 강아지를 집에 데려와 대충 발을 닦아 주고는 다시 나가서 참외 한 봉지를 사 들고 왔다. 참외는 참으로 달고 맛있었다.


그렇게 며칠 보이더니 어느 날부터 그분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은 것은 잘된 일일까? 더 좋은 자리를 찾아갔으면 다행이겠다. 아니면 손해를 많이 보고 참외를 버렸으면 어쩔까나. 보이지 않은 그분에 대해 궁금함은 내 오지랖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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