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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by 동틀무렵

오랜만에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어쩌다가 발생한 생채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모서리에 부딪혀 턱 아래가 찢어졌다. 작은 상처지만 세수하기도 면도하기도 성가시다. 어머니가 옆에 계셨다면, “숫 벼룩 똥구멍만 한 상처 가지고 뭘 그러냐?” 하셨을 거다. 언제나 아물까 싶어 상처를 들여다보았더니 그에 앞서 커다란 얼굴이 동공에 다가온다. 얼마나 오랜만에 내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구석구석을 보았던가. 너무 낯설어 저것이 나인가 싶다.


세수하고는 화장수 한두 개를 대충 처덕처덕 바르면 그만인 채로 살아왔다. 그리 명징한 시력을 갖지 못한 축복으로 얼굴 표피가 그럭저럭 말끔한 줄 알고 지냈는데, 거울 가까이 바짝 들이밀고 보니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만만치 않다. 가까이 있는 것은 현미경으로 보듯 더 잘 보인다는 것이 근시의 축복이라시던 고교 시절 생물 선생님이 떠오른다.


내 얼굴도 어린 시절에는 갓 내린 백설같이 티끌 하나 없었을 거다. 그때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하지만, 어린 시절 사진이라곤 졸업앨범에 있는 손톱만 한 사진이 전부다. 유독 기름기가 많은 지랄성(지루성) 피부라나? 사춘기가 되자 무시로 얼굴 곳곳에 튀어나온 종기만 한 여드름을 터트린 자국도 보였다. 잠시 중학생이 되어 그 시절을 돌아봤다. 내 별명이 멍게였던가.


언제 저 희미한 점들이 자리 잡았으며, 물집처럼 투명하게 그 무엇이 부풀어 오른 좁쌀만 한 저것은 또 뭐지. 다행히도 상대가 한 번에 눈치챌 도드라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자꾸 들여다보니 더욱더 내 얼굴이 아닌 것 같다. 육십여 년 세월에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해 보지만, 처져가는 볼과 눈가를 보며 손바닥을 크게 펼쳐 얼굴에 대고 사방으로 당겨본다. 십 년 세월이 감쪽같이 지워진다. 또 잠시 무상함에 젖어본다. 프랑스 여배우 ‘시몬 시뇨레’는 사진사에게 “주름살 만드느라 수십 년 걸렸어요. 눈가 주름 잘 찍어 주세요.”라고 말했다지. 노배우의 품격과 달관의 경지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긴 세월 살아오면서 어찌 얼굴에 생채기 하나 없을 수 있으랴. 공직자들은 퇴임 때에 상투적으로 ‘대과 없이 소임을 마치게 되어’…라고 한다. 큰 잘못 없이 마친 것은, 달리 말하면 움츠리고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얼굴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날, 수백만 시간 맨살을 드러내고 마음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표정으로 쏟아내는데 어찌 태어날 때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할까. 그런 긴 시간 뒤에는 그리 아름답지 않은 흔적이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동안 신경 쓰게 하는 저 생채기도 며칠만 지나면 감쪽같이 사라질 테고, 이만하면 아주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친구 녀석은 몇백만을 들여 레이저인지, 뭔가로 얼굴을 지졌다고 하더니 만날 때마다 말끔한 얼굴을 자랑한다. 나도 그래볼까 하는 생각은 기백만 원의 돈 앞에 기어들어 간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단다. 그동안 스스로가 한 행동과 사고의 결과라는 뜻일 것이다. 얼굴은 시간에 따라 반드시 변하지만, 마음과 행동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남을 헐뜯기 좋아하고 바르지 않은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왠지 강퍅하고 날카롭게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대중에게 자주 얼굴을 보이는 스스로 공인이라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은 확실해 보인다.


웃는 얼굴이 최고라는 생각에 빙그레 웃어보지만, 평소의 ‘근엄, 진지’가 내 얼굴을 그런 쪽으로만 단련시켰는지 영 어색하다. 억지로 미소를 짓다 보니 과거 직장 상사 한 분이 생각난다. 거무튀튀하고 너부죽한 얼굴인데도 늘 인자한 미소를 띤 편안한 얼굴이었다. 자기 얼굴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날마다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을 한다고 했다. 오랜 시간 그렇게 했더니 자연스레 미소가 깃든 얼굴이 되었다고 했다. 몸의 근육을 단련시켜 신체를 아름답게 만들 듯, 웃음으로 단련시켜 얼굴을 바꾼 것이다.


웃을 일이 없어도 억지로 웃어야 한단다. 사람의 몸에서는 날마다 수천 개의 암세포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암에 걸리지 않는 것은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면역세포는 웃으면 활성화된다는데, 신기하게도 웃는 모양만 해도 그렇게 된다는 말도 있다.


많이 웃지 않았던 세월이 아쉽다. 얼마일지는 알 수 없으나 남은 시간도 이 얼굴로 세상을 만나야 하니 웃는 것으로 내 얼굴을 다시 만들어 봐야겠다. 기백만 원 든다는 레이저로 한 꺼풀 벗겨내면 얼마간은 말끔해지겠지만 웃음으로 성형한다면 오래오래 평생을 가겠지. 물론 시술비는 공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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