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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칼

by 동틀무렵

‘그 사람 뭔가 한 칼 있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한칼’이라는 단어는 ‘한번 휘둘러서 베는 칼질’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그 사람 한 칼 있어’라고 할 때는 그 뉘앙스가 조금 다를 것 같다. 이때의 칼은 칼질하는 행위가 아니다. 한 자루의 칼을 품고는 있으나 좀처럼 내보여지지 않고 숨겨져 있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원한과 복수를 다짐하며 가슴속에 품은 비수가 아니며, 때가 오면 그 무엇을 슬쩍 베어버릴 것 같은, 남다른 능력이 하나쯤 있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가 더 무섭다지만, ‘한 칼’은 칼집조차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무엇이다. 그래서 사전에 있는 ‘한칼’은 두 글자가 붙어 있지만, 이럴 때의 ‘한 칼’은 한 글자씩 띄어 써야 할 듯하다.


소싯적에 여러 기고만장한 생각을 가질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 중에는, 직장생활에서 상사를 무시하거나 깔보는 심정을 갖는 것도 있었다. 물론 겉으로야 그랬겠냐만 속으로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 위치까지 올라갔지?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시간의 흐름에서 자연히 얻게 된 경험은 그런 오만을 잠재우게 했다. 어떤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언젠가는 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때의 어느 상사는 말수도 별로 없었고 딱 부러진 지시도 거의 없이,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분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구성원이 그분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만만하게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워크숍에서 그분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모두가 그분의 강연에 깊이 감명받았고, 이구동성으로 그분에게 그런 힘과 깊이가 있는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또 나를 자주 괴롭혔던 회사 내 다른 조직의 리더가 있었다. 그는 나의 부서가 잘못하여 자기 조직의 실적이 좋지 않다는 불만을 자주 드러냈다. 언젠가 행사에서 만났을 때 대화해 보니 아주 기초적인 것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를 무시하는 마음이 생겼다. 더구나 평소의 앙금이 더하여 ‘어떻게 저런 사람이….’ 하는 그에 대한 평가가 자리 잡았다. 그 생각은 그가 퇴사할 때까지 변치 않았다. 그런데 그가 회사를 떠난 후 경쟁사로 가서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역시 내가 모르고 있는 한 칼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경험은 하지 않았어도 외부에서도 인정받았다면 분명 그도 ‘한 칼’이 있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그 후에도 나를 거쳐 간 몇몇 상사도 그런 경험을 주었다.


그런 경험이 쌓여, 어떤 위치에 오른 사람은 반드시 숨겨진 ‘한 칼'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에 남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얄팍한 내 인생 지론의 하나로 간직하기로 했다. 이 지론은 이제껏 유효했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서 또 젊은 시절의 오만한 생각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사회 여러 계층에서 쌓은 경험과 얻은 명성을 밑천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며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다. 과거에 수만 대군을 호령했을 군인, 기업이나 큰 조직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기에 나라를 위해 깊숙이 품고 있는 한 칼을 보여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군인 출신이라면 뭔가 단호하고 강렬한 눈빛에서 단단한 무인의 풍모가 절로 우러나오는데, 그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수십 년 무인의 자존심은 어디에 두었는지 자기 편의 이해에 핏대를 올리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수만의 사람을 지휘하고 미래를 창출했던 기업인은 애초의 포부에 멀어져 흔적조차 희미하다. 법으로 세상을 다스렸던 자들은 마치 법과 담을 쌓은 양 행세한다. 정치판에서는 다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그들도 과거에 ‘한 칼’을 품고 있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그로 인해 또다시 오만함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제발 그들도 한 칼이 있음을 다시 보여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 한 칼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큰 능력을 보이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나라와 국민에게 떳떳하고 올바르게만 행하면 되는 일이다. 그래야 기껏 세워 놓은 내 인생 지론의 하나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날로 거칠고 지저분해지는 정치판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어이쿠! 나를 스쳐 간 사람들은 나도 ‘한 칼’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쭈뼛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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