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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by 동틀무렵

무심코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저만치 앞서가는….’으로 시작하는 노사연 가수의 ‘님 그림자’다. 곡조와 노랫말이 딱 우리네 정서인 이 노래가 얼마 전에야 번안곡임을 알고 섭섭하기까지 했다. 이별인지 만남인지 모를, 임을 향한 애끓는 연모가 침묵 속에 있다. 달빛 아래 저만치 걸어가는 님 그림자를 밟는 모습에서 그리움과 아련함이 절로 느껴진다. 처연하고 애달픈 곡조가 웬만한 일은 속으로 삭이는 은연(隱然)이라는 우리네 서정을 닮았다.


도회지에서는 늘 땅과 주변을 살핀다. 보도블록이 반듯한 거리에서도 행여 발끝에 뭔가 차일까, 수시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아우라처럼 둘러싸고 있는 인공의 과잉 조명에 눈길을 빼앗긴다. 그렇게 지내 온 시간이어서인가. 언제부터인가 밤에도 하늘이 있다는 것을 잊었다.


벌써 오래전부터, 밤하늘은 비어 있었으니 쳐다본다는 것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 옛날, 여름밤이면 마당에 가마니 한 장 깔고 앉아 북두칠성을 찾고 은하수를 보며 우주를 동경했던 시절은 이미 멀어진 기억이다. 조용한 곳에 여행을 갈 때면, 불현듯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찾아보지만, 그 옛적의 하늘이 아닌 듯 별마저 낯설다. 탁해진 대기에 반짝임을 잃어버린 몇 개의 별들이 형광물질처럼 하늘에 붙어 있을 뿐이다.


반짝임이 사라진 별이라도 듬성듬성 보이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이 있다. 달빛이 사라졌다. 하늘에 걸린 달은 그대로이건만 어찌 된 일인지 달빛은 땅에 내려앉지를 않는다. 수십 년을 잃어버렸으니 이제 달빛의 기억마저 흐릿하다.


한낮의 열기가 사그라지는 여름밤이면 아버지와 강으로 멱을 감으러 가곤 했다. 손에 든 것은 호박잎에 싼 빨랫비누 하나다. 철길을 건너고 작은 논과 밭이 있는 들판을 지나며 둑길을 걸었다. 휘영청 달이 뜬 밤이었다. 좁은 둑길을 달랑달랑 뒤따라가는 나에게 달빛은 아버지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그런 밤이면 하필 풀숲의 벌레들은 더 크게 노래했다. 여름밤의 달빛은 엄마의 치마폭처럼 푸근하고 치마폭에 물들인 꽃무늬같이 은은하다.


겨울밤의 달은 까만 밤하늘에서 툭 치면 바스라 질 듯 쨍하다. 함부로 말을 건넬 수 없는 도회지의 차가운 처녀처럼 날카롭다. 독야청정(獨夜淸淨), 그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고 날이 차가울수록 빛의 명도는 더 선명하다. 그런 겨울밤, 변소(화장실이 아니고 변소다)에 간다는 동생은 “오빠 무서워”하며 나를 앞장세웠다. “오빠 거기 있어?” 하며 자꾸 확인한다. 나는 동생을 지키며 뜨락에 내린 달빛에 싸여있다. 달빛이 내린 마당은 어린 오누이만의 뜨락이어도 무섭지 않았다.


햇빛은 공간에서 부서지며 널리 퍼져서 땅에 내려앉지 않는다. 천지사방을 훤히 비추고 있으나 빛깔이 없다. 색이 없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달빛은 공간을 헤집고 땅에 내려앉는다. 그때의 달빛은 은색 같기도 하고 노르스름한 빛의 알갱이가 공간에 떠 있는 듯하다. 이럴 땐 달빛이 아니라 ‘달볕’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땅에 내려앉은 달빛은 희부연한 그 무엇이다. 그것은 설핏 내린 白雪인가 싶고, 서리가 앉았는가도 싶어 발바닥으로 땅을 비벼보게도 했다. 형설(螢雪)에도 글을 읽었다던데, 달빛에도 글자가 보일까 싶어 책을 들고 뜨락에 서본 적이 있었다. 큰 글자는 윤곽이 희부옇게나마 보였다.


어둠에 빛이 필요하겠지만, 달빛에는 어둠이 필요하다. 시각 장애인이 든 등불은 타인이 부딪치지 말라는 배려의 마음이지만, 도시의 불빛은 나를 보아달라는 도발의 빛이다. 그런 빛의 진격에 달빛은 물러나고 말았다. 인공의 빛은 어둠을 만들지 못하였고, 달빛은 먹혀버렸다. 우리는 그런 달빛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들은 쉬이 잊어버린다.


막 시집간 새색시 같이 돌아앉아 절대 보여주지 않던 달의 뒷면까지 인간은 기어이 보아버렸고 우주선까지 내렸다. 벌써 반세기도 더 전에 달에는 절구질하는 옥토끼가 없다는 것도 알아버렸지만, 왜인지 우리는 신화에서 깨어날 줄 모른다. 달은 그대로이고, 달빛도 그대로 있을진대 그것을 잃은 지 오래다. 높은 산꼭대기 최첨단 망원경으로 수십억 광년 너머의 별빛은 볼 수 있어도, 오늘도 손에 잡힐 듯 하늘에 걸린 저 달의 빛은 영영 잃어버렸다. 내일은 6년 만에 가장 큰 슈퍼문이 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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