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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Jul 29. 2022

희열(喜悅)의 경험

'기쁨‘, ’열락(悅樂)‘, ’희열(喜悅)‘..

사전으로는 기쁘다는 같은 의미의 단어지만, 나는 그중에 ’희열’이라는 단어가 극한의 기쁨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마 ‘열(悅)‘이라는 글자에서 ’뜨거울 열(熱)’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단 한번, ‘희열’이라고 해도 좋을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요즘에는 전자산업을 크게 ‘반도체‘와 ‘가전’으로 나누지만,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시기에는 반도체는 막 태동의 시기였고, 대개 ‘가전’과 ‘산업전자’로 분류했다. 산업전자는 ‘System전자산업‘이라고도 했으며, 하나의 제품이 복잡하고 거대한 전자장비 덩어리이다. 내가 담당했던 시스템은 당시에는 선진 몇 나라 정도만 독자 개발이 가능한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시스템이었는데, 우리나라는 자체 개발과 생산을 할 능력이 없어서 기술 이전을 전제로 해외 장비를 도입하여 사용했던 시기였다. 


입사 후 첫 발령지는 부산의 어느 현장이었다. 하나의 시스템은 백 평 이상의 장소를 점유할 정도의 크기였으며, 모양은 가끔 뉴스에서 보이는 IDC 센터의 서버실과 비슷하다. 통상 12개월~18개월간 설치 및 테스트를 거쳐, 정부로부터 최종 인수시험을 받는데, 내가 부임했을 때는 자체 시험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고 한 달간의 최종 인수시험과 준공을 앞둔 즈음이었다.


시스템은 Fault가 있으면 인지하자마자 ’여기에 이런 문제가 있소‘ 라며 자동으로 메시지를 뿌려주는데, 우리 현장의 시스템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Fault가 한 개 있었다. 그놈은 이 시스템을 도입 후 처음 보는 메시지이자, 가끔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아주 고약한 놈이었다. 준공시한은 다가오고 모두가 마음은 타들어갔지만 해결은 난망했고, 결국 본사에 기술지원을 요청하여 최고 실력자들이 왔다. 그러나 그들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해결을 못 했고,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철수한 것은 준공시한까지 불과 보름 정도가 남은 시점이었다. 참으로 애타는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건방지게도 내가 한번 해결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부담감이 없는 신입사원이어서 그런 생각을 한 듯하다. Fault에는 어떤 문제라는 정보를 대략 알려주는 숫자가 붙어 있는데, 이를 참고하여 복잡한 전자회로가 빼곡하게 그려진 커다란 회로도 수십 장을 날마다 하숙집으로 들고 가서 파고들었다. 추운 겨울이라 냉굴 같은 하숙방에서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일주일 정도를 들여다보니, 대략 어떻게 추적하면 되겠다는 것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몇 년 전 부산에 잠시 근무 시. 일부러 그 하숙집을 찾아갔더니, 건물은 그대로이나 식당 겸 하숙을 치던 ’일미 식당’이라는 간판 대신 노래방이 들어서 있었다.)


드디어 그동안 연구(?) 한 것을 현장에서 적용해보기로 한 날은 일요일이었다. 선배들에게 건방으로 보일까 싶기도 하고, 신입 주제에 턱도 없는 시도를 하는 모습에 꾸지람을 들을까 하여 휴일로 정했다. 지금의 전자기기는 거의 100% 디지털 소자이기 때문에, 회로를 계측기로 분석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당시의 시스템은 상당 부분이 트랜지스터 등 아날로그 소자였기 때문에 엔지니어들은 계측기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던 시기였다. 머릿속에 그려 놓은 시험 프로그램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 일요일, 혼자서 시스템의 각 장치를 추적하는, 그 자체로도 뿌듯하고 대단한 엔지니어가 된 느낌이었다.     


전자회로는 복잡하지만 단순하다. 입력에 대한 출력이 기대한 값이면 정상이다. 몇 시간을 여기저기 Test를 걸어놓고 각 회로의 출력과 파형을 따라간 끝에, 드디어 문제라고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결과는 아주 단순하고 허망했다.

중앙컴퓨터 앞단의 중요한 주변장치에서 이상을 발견한 것이다. 각 회로가 연결된 기판의 핀 두 개가 이물질에 의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각 회로를 연결할 때 手작업으로 가느다란 Jumper선(일종의 전선 비슷한..)으로 연결하는데, 작업 시 잘라낸 찌꺼기가 회로에 불완전하게 붙어 있어 Fault를 반복한 것이었다. 확실히 붙어 있었으면 계속 발생할 텐데, 붙은 듯 만 듯한 상태여서 가끔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제거하고, 다시 붙이기를 반복해보니 그게 원인임이 확실했다.     


그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상큼한 알맹이가 톡톡 터지는 듯하고얼굴에는 홍조가 들며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전기가 흐르는 듯이 짜릿한 그 무엇이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훑어 내려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지금도 그때 털썩 주저앉은 느낌만은 생생하다.     


그때 마침 현장 책임자께서도, 나름 해결해 보려고 휴일임에도 사무실로 들어오다가 장비 사이에 앉아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소리쳤다.     


잡았어요!‘ 

(Fault나, Error, Bug를 제거하는 것을 ’ 잡는다 ‘라고 표현한다)          


다음 날, 본사 부장님도 입사 한 달의 신입사원이 해결했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전화를 주셨고, 잠시 나의 이름이 전국 현장에 회자되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얼마 후 입사 7개월 만에 고향에 있는 현장에 책임자로 가게 되었다.    



그런 극한의 ’희열‘을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비슷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은 열 달에 걸쳐 조금씩 기쁨이 분산된 것이었으니 짧은 시간에 시간을 집중하여 단칼에 난제를 해결한 그때의 감정과는 좀 달랐다. 안도감이 더 큰 느낌이랄까.     


쓰고 보니 자랑질이 되었지만,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선배들은 너무 어렵게 접근을 했고, 나는 경험과 기술력이 일천하여, 오히려 기초적 방법으로 소 뒷걸음에 쥐 잡은 격일 뿐이었다.   

  

이 경험은, 그 이후 유사한 난제를 만날 때마다 '기본부터, 처음부터, 차근차근하게...'를 되뇌게 하였고,  혹 자서전을 쓴다면 직장생활의 첫 페이지를 차지할 소중한 추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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