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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Nov 08. 2022

커피밭 사람들

  청장년 시절에 책 읽기를 등한시한 보상심리로 은퇴 후 급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는 있으나, 읽어도 그 내용과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고 읽었다는 성취감의 만족만 하고 있다. 독서력(力)과 독서력(歷)이 얕고 짧아서 독후감을 쓸 정도는 안 되지만 최근에 읽은 한 권의 책이 초등시절의 ’독후감 대회‘ 이후, 처음으로 그 비슷한 것을 쓰게 하고 있다.

     

’커피밭 사람들(임수진)’이라는 책이다. 젊은 학자가 살아있는 논문을 쓸 목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직접 체험한 커피농장의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요즘 유행하는 책처럼 몇 장의 사진과 듬성듬성한 감성적 글로 채워진 그런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서문을 한 페이지 읽고는 바로 책에 빠져버렸다. 우선 논문을 위한 체험기록의 문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유려하고 문학적인 표현이 나를 책 속으로 깊이 이끌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을 더 깊이 있는 책이게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먼저 저자의 용기이다. 서른 남짓의 여성이 홀로 무작정 남미의 커피농장을 찾아가서 커피 노동자들의 삶에 스며들어 생활하며 그들의 삶을 생생히 체험을 기록한 그 용기는 도무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남자라도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일 것이다. 저자의 용기에 나 자신이 더 쪼그라지고 젊은 날 나는 그런 용기를 내본 적이 있었는지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렇지는 않았다.

     

두 번째는 저자가 사람을 대하는 따스한 심성이 결코 거짓과 과장이 아님을, 글로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독자들이 알게 되는 것이다. 몇 달간의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어 세월이 지난 후에도 한국에서 다시 남미의 시골 마을로 친구를 찾아가는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프레디 ’부부와의 진정한 우정, 그들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에서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처럼, ‘찾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라는 소제목에서 슬픈 결말을 예견하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은 채 책을 따라가 보았다. 드디어 친구의 집을 찾아갔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고 그의 아들과 할아버지만을 만나면서 울었던 저자의 심정이 나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나도 기어이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결국 행복한 결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과의 이별을 택한 프레디에게 남모를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다니 나중에라도 반전을 기대해 본다. 또 다른 친구인 ‘엘레나’ 부부에 대한 우정 어린 관심과 병상에 있는 엘레나의 남편 ‘기예르모’를 찾아가는 여정도 험난하고도 가슴이 아리다. 하늘은 왜 선한 눈망울 가진 기예르모에게 하반신 마비가 될지 모르는 가혹한 시련을 주는 걸까? 그리고 ‘도냐 베르타’, ‘도냐 루신다’ 등 이름이 비슷한 인심 좋은 농장주, 시골집 아주머니 등, 한결같이 착한 사람들로 이 책은 가득 채워져 있다.

     

그게 가능할까?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이며 현재 멕시코 대학교수인 저자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남미 시골의 노동자들과 포장되지 않은 진실한 우정이라니.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서로가 따스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책에 따르면 남미의 커피 노동자의 삶은 참으로 신산하고 비참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다 같은 남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과이미 인디언’ 출신의 커피 노동자들도 서로 간에 갈등과 차별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종일 농장에서 커피를 따는 노동의 대가로 스타벅스 한 잔 값에 해당하는 단지 4~5달러를 벌뿐이다. 그나마 커피 수확 철을 따라 일 년에 여러 군데를 떠돌며 가족, 어린 자녀들과도 떨어져 사는 애달픈 삶과 소를 키우는 축사에서의 빈곤한 생활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를 위해주는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국가의 경계를 벗어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기도 하고, 커피농장 노동자, 식모, 목장 관리인 등의 삶을 사는 그들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조금씩 모은 돈으로 엉성한 방 한 칸의 벽돌집을 몇 년에 걸쳐 짓기도 하고, 억척스레 모은 거금을 투자하여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노동을 시작하는 그 아이들을 보며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열세 살 나이에 서울로 식모살이 간 내 어린 친구가 떠올랐다. 애달프고 가슴을 아리게 하는 그들의 삶을 엿보면서, 몇천 원짜리(지금은 턱도 없지만) 점심을 먹고 사오천 원이나 하는 ’아아‘를 우아하게 들고 다니며 행복함을 느끼는 우리는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책은 또 중간중간에 저자가 학자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남미의 역사와 사실, 커피의 경제학 등을 깨알 같은 주석을 달아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기쁨을 준다. 브라질, 콜롬비아가 카피의 주생산지로 기억하는 학창 시절에 배운 사실은 이제 바뀌어, 지금은 베트남이 세계 2위의 생산국이며 인스턴트커피의 원재료는 거의 베트남산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남미의 커피 노동자들은 더 힘들게 되었고 세월이 가도 삶은 더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 책이 십여 년 전에 쓴 책이기는 하나 지금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루 노동의 대가가 만원도 안 되는 그들의 삶을 딛고 있는 커피 산업은 생산단계와 최종 소비단계에서의 가격은 약 300~400배의 차이가 벌어져 있다고 한다. 기업에서는 높은 부가가치 창출을 사업의 목적과 이상으로 생각하나, 커피 산업과 같은 현상을 보면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부가가치라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하는 회의로 머리가 혼란하기까지 하다. 유통을 거치면 부가가치가 붙을 수밖에 없지만, 90% 이상의 부가가치가 파생되는 현상은 단연코 정상이 아니다. 1차 생산의 가치가 과도하게 낮게 평가되었거나, 최정점에 있는 기업의 과도한 가격 매김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진짜 적은 대립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드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라는 글이 떠오른다.

 

나는 커피를 잘 모른다. 그리 즐기지도 않는다. 마시는 커피도 고향 사투리를 섞어서 ‘봉다리 커피’라고 즐겨 부르는 커피 믹스이다. 이것은 쌉싸래한 커피의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설탕의 달콤함과 혼합된 유제품의 부드러움 때문에 마신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듯하다. 언젠가 해외 출장을 갔을 때, 아침 식사 후 이 커피 믹스가 참을 수 없이 생각이 났다. 다행히 같이 간 일행이 몇 개를 가져와서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는데, 그때 하루에 서너 개씩 먹던 커피 믹스에 중독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아침에 또 한잔의 커피 믹스를 마신다. 궁금하다. 저자의 친구 ’프레디‘ 부부는 그 뒤 다시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는지, ’엘레나‘ 부부는 남편 ’기예르모‘가 병상에서 일어나 그 밝은 미소를 다시 찾았는지…. 이제는 커피 한잔을 먹을 때마다 그들의 신산한 삶, 어디에선가,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게 지속될 것 같은 그들의 애달픈 삶이 떠 오를듯하다. 진정 그들이 행복하기를, 아니 책에서의 삶보다는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고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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