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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Nov 10. 2022

은행나무는 억울하다

아낌없이 주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만큼 슬프고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누구나의 가슴 깊은 곳에 샛노란 추억 한 잎으로 남아 있는 은행나무를 두고 해마다 말들이 어지럽다.

     

가을은 색의 계절이다. 붉은색, 갈색과 힘을 잃은 초록이 어울려 있는 세상에, 샛노란 은행잎이 없다면 가을의 그림은 미완으로 남으리라. 그 샛노란 색을 보여 주는 많지 않은 자연에서 은행나무는 가장 명료한 그것을 보여 준다. 은행나무는 겨울 앞에 악착같이 버티며 우리에게 마지막 가을을 선사한다.


몇 년 전 부산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회사생활도 끝이 보이는 시기에 또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심란한 마음을 안고 열차에 몸을 실어 부산으로 향했다. 12월 초여서 서울은 벌써 을씨년스러운 겨울이었다. 몸과 마음은 더 움츠러들었고, 부산역에 내리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때 부산역 앞 중앙대로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아직도 노란 잎을 무성히 달고 있던 은행나무였다. 이미 가지를 놓친 잎들은 바람에 몸을 뒤척이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잎이 아직 겨울은 멀다는 듯 밤하늘을 빼곡히 가려 마치 주홍색 가로등 아래 있는 듯했다. 서울의 차가운 겨울을 회귀하여 다시 가을을 만나니, 떠나올 때의 잿빛 같던 마음이 갑자기 환해지며 흐렸던 마음도 개었다.

      

 이맘때가 되면 은행나무가 싫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이 많다. 나무가 떨구는 열매의 냄새가 싫은 이유이다. 관리기관도 은행나무를 뽑아버리거나, 열매가 열리지 않는 수나무만 선별해서 심는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담벼락을 따라 심어 한 그루씩 맡아 돌보았던 은행나무가 언제인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 내가 돌보던 나무를, 성년이 되고도 한참 동안은 마치 분신 보듯 보아왔는데 굳이 없애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베어버린 것도 이런 이유였을까? 다니던 중학교 교정에 암수 두 그루의 은행은 모양이 확연히 달랐다. 수형이 둥그레 한 한쪽은 암나무라고 했고, 다른 쪽은 삐죽하게 위로 커가는 모양의 수나무였다. 그 기억으로 길가의 은행나무를 유심히 보아도 공해로 인한 발육이 더뎌 그런지, 아직 수령이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 암수 구분은 십 년이 지나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얼마 전에 빨리 판별하는 기술까지 개발되었다니 나무는 앞으로의 종족 보존을 걱정할 것이다.

      

은행나무는 억울하다. 흔한 나무 벌레나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가루도 내뿜지 않고, 뜨거운 여름날에는 푸르름과 시원한 그늘을 베푼다. 가을의 노란 잎은 뭇사람의 가슴에 깃들어 있는 책갈피 속의 추억과 첫사랑을 끄집어낸다. 생명을 다해서도 그 단단함과 아름다운 무늬에 쓸모를 더하여 오랫동안 인간의 곁을 지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무가 한해의 마지막 결실을 내리는 고깟 열흘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는 것에 얼마나 억울해할까. 모든 것을 주었거늘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는 인간이 그 얼마나 미울까. 지금은 거의 없지만 시골 밭에 흩뿌려 놓은 인분 냄새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일부의 말에 휘둘려 아예 가로수에서 퇴출하겠다는 관공서의 발상에도 찬동이 되지 않는다. 수억 년 전에 지구상에 뿌리내린 뒤 진화를 멈춘 것도, 더 이상의 진화는 필요 없는 나무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서울에 오래 살아도 별로 다녀 본 데가 없기에 은퇴 후 틈틈이 옛것을 탐했는데, 작년 여름에 성균관에서 본 거대한 은행나무에 압도되고 말았다. 뿌리에서 자라난 대여섯 개의 곁줄기가 본체와 한 몸이 되어 둘레만 십 미터가 족히 넘는 네 그루의 나무가 수백 년 지켜온 시간 앞에, 마음이 절로 여미어졌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장엄함이었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 장관을 생각하며 다시 오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풍경이 아름답다고 해도 마음은 늘 스산한 계절인데 거대한 슬픔에 빠진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심란한 마음에 집안을 뒹굴다 작년에 ’쿵‘하며 심금을 울려주었던 성균관의 은행나무가 불현듯 생각나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은 좀 이른 모양이다. 명륜당 앞뜰의 나무는 노랗게 물들었으나, 대성전 마당의 나무는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 있다. 한 열흘쯤 뒤 다시 가봐야겠다.


샛노랗게 물든 나무를 보며 찬탄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날은 구름이 햇빛을 알맞게 가려주고 조금은 센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주면 좋겠다. 흰 눈이 난분분(亂紛紛)하듯 노랑나비들이 이리저리 날며 땅에 내리고, 내려앉은 나비들은 사르륵 몸을 뒤틀며 나의 마음에 가을의 마침표를 찍는 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옷깃을 세우고 스산한 마음을 추스르며, 나도 나무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억울함을 토닥일 것이다. 이제 가을의 끝이 오면, 성균관 뜨락의 은행나무를 찾는 것은 해마다 해야 할 나만의 의식(儀式)이 될듯하다. 고마운 나무야. 억울해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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