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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Nov 18. 2022

서울에서 이육사(李陸史)를 만나다

올봄, 멀리 가지 않아도 가까이 있는 개운산공원의 벚꽃도 볼만하다고 하였다. 걸어서 한 삼십 분이면 족하니 운동 삼기도 좋고 왠지 남들이 다 하는 벚꽃 구경을 하지 않으면 뭔가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나를 거기로 이끌었다. 절정을 지나 벌써 흩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걷다 보니, 이전에 두어 번 갔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커다란 시비(詩碑)가 보였다.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의 시 ’광야‘가 새겨진 커다란 바윗돌이었다. 내 고향이 배출한 민족시인이라 평소 흠모하는 시인의 시비를 여기서 보는 기쁨에 한참을 시비 앞에 서서 시를 찬찬히 읽었다.


고교 시절에 ’광야‘를 처음 접한 후,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흥취가 오르면 누군가가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시작하는 첫 구절을 읊으면 모두가 감정이 치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곤 했다. 드디어 마지막 구절,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울게 하리라”의 절창을 읊을 때면 웅혼한 기상에 취해 당장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떠나야 할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소울 푸드라는 것이 있듯이, ’광야‘는 우리의 영혼의 시였다. 그런데 좀 뜨악했다, 이육사의 시비가 왜 아무 관련이 없는 서울 한복판 공원에 시비를 세웠는지 까닭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냥 시가 좋아서 여기서 시비를 세웠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고향에서 구한말의 의병 활동 등, 향토 사학을 공부하는 고교동기가 대화방에 올린 것을 보고 육사의 시비가 개운산공원에 세운 이유를 대략 추정할 수 있었다. ‘이육사의 순국 78주년 기념 육필 특별전시‘를 안동, 대구, 서울에서 개최하니 동기들이 관심을 가지고 가보기를 권하는 내용이었다. 서울에서 하는 전시장소를 찾아보니, ’문화공간 이육사’라는 전시관이었고 집에서 멀지 않은 종암동 어느 골목에 있었다. 서울 한복판 종암동에 기념관이 있는 이유는 이러했다. 이육사가 1939년부터 3년간 종암동에 거주했고, 그 시기에 ’청포도‘, ’절정‘ 등의 대표적 시를 발표했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요즘 지방자치 단체마다 어떤 예술가, 문학가가 자기 지역과 조그마한 연관이라도 있으면 기념관을 만든다, 추모공간을 만든다, 하며 관광 상품화하는 경향을 비토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비록 상품화의 목적이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그분들의 삶을 기리고 후대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그리 나쁘게 볼일인가 싶다는 것이 내 생각이니, 잘했다 싶었다. 그런 인연이 개운산공원에 이육사 시비가 세워졌던 이유였다. 종암동 살 때 지은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로 시작하는 시 ‘청포도’ 또한 초여름 살랑이는 바람을 마주하며 소주라도 한잔할 때면 친구들과 자주 읊조리는 시였다. 고향의 향수를 그리며 내일에의 기다림을 희망했던 청포도는, 또한 우리들의 영혼의 시이다.


전시회 기간에 맞추어 지난 10월 6일, 일부러 시간을 내어 들렀다. 종암동 주택가 모퉁이에 3층짜리 조그만 건물이었다. 1층은 모임 장소, 2층은 상설 전시관이었고, 3층에 이번 전시품을 풀었는데, 전시관의 크기는 한 다섯 평 정도나 될까 싶게 작았다. 그래서 무슨 무슨 ‘관’이라 하지 않고, ’공간’이라고 했나 보다. 3층에 올라가니 관람객은 아무도 없었다. 들어가니 나이 지긋하신 해설사께서 반색한다. 이육사를 아느냐고 묻기에 고향이 안동이라고 했더니, ’더 이야기할 게 없겠네..‘ 하면서도 차근차근 설명해주신다. 원래 육사가 살았던 자리는 지금 빌라가 들어서 있어, 현재 자리를 구하여 문화공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해설사는 아직 이육사 생가와 문학관도 못 가봤다고 했지만 해박한 지식을 곁들여 내가 몰랐던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막연히 알고, 그냥 시를 좋아하고 민족 저항시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분의 해설을 귀 기울여 들었다. 이번 전시물들은 이육사가 생전에 쓴 편지 등 직간접적인 육필 유품들이었다. 친구, 친지들에게 보내는 엽서, 편지글에서 당시의 고초와 곤궁함이 묻어 나온다.

      

관람을 마칠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전시 초라서 그런 모양이다,라고 생각도 했지만, 골목길 조그만 공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손꼽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관람객이 없으니 전시된 유품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나오는데 해설사가 팸플릿이며, 메모지 등을 특별히 더 챙겨 주신다. 다음 주 월요일에 이육사의 따님이신 ’이옥비 여사‘가 여기에 오니 또 오라고 했으나, 아쉽게도 그때는 시간이 되지 않았다.

     

이육사는 진정 초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 39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17차례나 체포 투옥됐다. 민족의 아픔과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며 선비의 지조를 지키시다가 순국한 이육사.      

명분과 지조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선열들을 접할 때마다, 나도 그럴 상황이 오면 그렇게 행동할까를 자문해 보지만 아직도 답을 얻을 수 없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 더 솔직하다. 관람을 마치고, 처음으로 100글자가 넘는 긴 방명록을 쓰고는 돌아서는 후손의 뒤통수에 육사의 꾸지람이 꽂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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