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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Nov 25. 2022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

독립운동가이며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은 내 마음에 존경을 넘어 경외의 어른이다. 평소 막연히 알고 있던 그분의 발자취를 더 알고 싶어, 그분의 후손인 어린 시절 친구의 말을 듣고, 책을 한 권 읽게 되었다. 석주 선생의 손부(孫婦)이며 만주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해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 경북의 대표적인 여성독립 운동가이신 ‘허은 여사(1907~1997)’가 구술(口述)하고 다른 분이 기록한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하는 책이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구한말 국운과 주권이 빼앗기는 나라의 운명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 활동을 일으킨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재종 손녀인 ‘허은 여사’가 구미 임은동에 세거하며 집안에서 했던 의병 활동과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만주로 떠날 때까지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내용이 1부였다. 2부는 만주에서 석주 선생의 손자(이병화)와 결혼 및 독립운동가를 뒷바라지하는, 차마 글로 옮기기 힘든 고난과 눈물겨운 사투를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3부는 석주 선생이 서거하시고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소회와 회한을 이야기하고 있다.

     

혼인을 위해 이 천팔백 리 길을 열이틀에 걸쳐 이동하는 이야기는 사랑보다는 더 무거운 그 무엇이 있다. 화전을 일으켜 농사를 짓고, 식솔과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는 이야기는 정말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절하고 가슴이 저민다. 먹을 것을 위해 일 년에 일곱 번이나 이사하고, 일본군과 나중에는 적이 된 중국 군인의 학살을 피해 야밤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맘이 조마조마하다. 마침내 1932년 석주 선생께서 서거하시고,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들어가서는 안 되니 이곳에 묻어두고 기다리도록 하라’는 유언이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관을 수레에 싣고 만주 벌판을 이동하는 장면은 상상이 되지 않는 처절함이다. 칠팔십 명의 家率들이 석주 선생의 관을 모시고 일본군과 중국 군인을 피해 야밤을 이용해 환국 길에 올랐으나, 결국 중국 군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삼 십리 길을 가다가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으니, 석주 선생의 令이 하늘에서도 통했던 것일까? 결국 선생을 가묘(假墓)하여 상을 치르고 다시 환국 길에 올라 걷고, 타고 하며 무려 석 달이나 걸려 서울에 도착했다니 과연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의 고난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 환국해서 석주 선생의 삼 년 상을 치르고, 계속되는 일제의 감시와 박해를 못 견뎌 ‘안동 월곡면 도곡면(돗질)’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시아버지(이준형, 석주의 장남)는 일본이 동남아에서 승리를 계속하는 소식을 듣고 이제 조국의 광복은 어렵겠다는 절망감으로, 1942년 臨終시를 남기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이후 남편은 6.25 전쟁 중에 죽고, 생때같은 아들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다섯 명이나 여사를 앞서 세상을 등지니 그 모진 아픔을 어찌 이겨내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1990년 9월 13일, 근 60년 만에 드디어 석주 선생의 유해는 예를 갖추어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다. 임청각 안치 행사에 안동시민이 구름같이 모였고, 군악대 소리가 고택을 진통케 했다고 한다. 그 장엄한 광경은 감동이 되어 지금의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으로 석주 선생의 한은 좀 풀리지 않았을까?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일가 어른 여섯 분도 그때서야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게 된다. 남편 이병화는 나중에 좌익 쪽에서 활동한 것은 맞는 것 같으나, 추구했던 사상과 이념이 현실과 너무 다른 것에 괴로워했던 것 같고, 군사 시절에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으니 크게 허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석주 선생은 독립유공자 서훈 중 3등급의 서훈을 인정받았을 뿐이고, 다른 분들도 별반 차이가 없다, 뒤늦게나마 허은 여사도 서간도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지금 석주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은 소유권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는데, 그 사유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조달과 석주 선생께서 국적까지 버리면서 독립운동을 한 결과임은 분명하다. 또한 서훈 재조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임시정부 초기에는 내각책임제여서 국무령이 얼마간은 정부의 주석이었음)이 3등급이 말이 되는가? 이런 문제에 모두가 좀 더 많은 관심과 정부의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책에서 알 수 있었던 새로운 사실도 많다. 당시 간도의 중국인들은 벼농사를 몰랐고 우리 민족이 가서 벼농사를 전파했으며, 심지어 좁쌀도 죽처럼 삶아 먹기만 했는데, 마적단에 잡힌 석주 일가 한 분이 좁쌀로 밥을 지어주니 마적들이 그렇게 좋아했고 그 덕에 목숨을 연장하고 다음 해에, 한 해 농사의 결과물을 마적들에게 주고 풀렸다고 한다.

      

단 한 권의 책으로 연약한 여성의 70년 고난의 여정을 압축했지만, 하나의 대하 서사였다. 이 책을 읽는다면 이분의 고난과 희생에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허은 여사는 지하에서도 우리 후손의 안녕과 번영을 지켜보고 기원할 것이다. 이 장대한 대서사를 어느 역량이 있는 작가가 나서서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을 써도 넘치고 넘칠 것이다.

      

※ 사족으로, 내 고조부님 갈문(碣文)에도 1934년 대홍수로 집안의 문집이 유실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책에도 1934년 갑술년 대홍수 이야기가 나온다. 갑술년 대홍수의 정확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았지만,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여러 글을 조합해보면 대략 1934년 경상남북도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준 대홍수로 추정된다. 또 고조부님 갈문을 지은 ‘해창 송기식'선생도 이 책에 나오는데, 석주 선생의 제자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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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 : 구한말 대표적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1878~1949] : 안동지역의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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