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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Jan 29. 2023

만 개의 도시락

얼마 전 딸아이가 회사에 도시락을 싸간다고 도시락통을 주문한다. 요즘 아무리 밥 먹는 양이 줄었다고 하지만 밥통의 크기는 몇 숟가락이 될까 싶을 정도이고 반찬통도 조그맣다. 여자아이들이 하는 소꿉놀이에서 보던 장난감 같아 보인다.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물가가 마침내 딸아이의 주머니에도 충격을 준 것인지, 아니면 사 먹는 밥에 싫증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반찬 해 줄 걱정이 늘어졌는데, 딸아이는 자기가 만들어 가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못내 미심쩍은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학창 시절 추억을 물어본다면 많은 이들이 도시락을 맨 먼저 떠올릴 것이다. 색이 벗겨져서 노란색보다 하얀색이 더 많은, 어디 한 군데쯤은 반드시 쭈그러져 있어야 그 안에 든 밥이 더 맛있을 것 같은, 그런 도시락의 추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사 학년 때부터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간듯하다. 태반을 차지하는 보리밥에, 단무지, 다시마튀각이나 멸치조림이면 아주 훌륭한 반찬이었던 시절, 어느 날 처음으로 어머니께서 도시락에 계란프라이를 덮어 주셨다. 계란프라이는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면 접대 음식으로 내어놓는 집이 있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얼마나 기대되고 점심시간이 기다려졌던지…. 친구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먹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까지 하면서 점심시간을 기다렸는데 하필 오전수업이 끝나자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심부름을 보냈다. 재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니 나를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빛과 분위기가 영 수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도시락을 열어보니 온종일 나의 기대를 받고 있던 계란프라이는 어디로 가버리고, 그것이 남긴 노리 죽죽 한 자국만 밥 위에 남아있었다. 순간 눈물까지 핑 돌았다. 그것을 날름 집어 먹은 녀석이 누구인지 알았지만, 분함과 억울함과 함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중학 시절의 도시락에는 좀 다른 기억이 있다. 혼식과 분식을 장려한 국가시책의 통제가 도시락에도 적용이 되었다. 잡곡을 반 이상 섞어야만 했고 매주 하루는 분식을 가지고 가야만 했다. 잡곡이 50%면 그런대로 쌀밥이겠지 하지만, 실제 보면 거의 깡 보리밥처럼 보인다. 그것을 점심시간마다 선생님이 다니면서 일일이 확인을 했다. 일부는 위에만 보리쌀을 살짝 덮어 오는 친구도 있었으니 그건 어머니의 사랑일까 아니면 어린 마음들의 얕은 속임수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식을 가지고 오라고 하기에 처음에 어머니와 한참을 고민한 기억이 있다. 국수를 가져갈 수도 없고 궁여지책으로 가져간 것이 빵이었다. 지금 길거리에서 더러 팔고 있는 옥수수 술빵같이 펑퍼짐하게 쪄서 뭉텅뭉텅 잘라 도시락에 담아서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는 풍경이지만 식량 자급자족을 이루고자 한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그 시절의 도시락을 다시는 맛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오래전 남이섬에 갔다가 그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산책로 중간쯤의 어느 간이식당에서 ‘추억의 도시락’이라는 메뉴로 그것을 팔고 있었다. 옛날의 그 노랗고 납작한 양은 도시락에, 밥 한 주걱에다가 김치 볶은 것을 조금 얹고 계란프라이 한 개 올리고 뚜껑을 덮어 일부러 가스 불 위에 올려서는 살짝 눌을 정도까지 데워서 주는 것이, 난로 위에 데워 먹던 도시락을 제대로 흉내 내었다. 그것을 한 통에 당시 일반 식당의 잘 차린 한 끼 밥값인 사천 원이나 받는데도, 가게 앞에는 이삼십 명이 길게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목장갑을 받아 끼고서 식구대로 한 통씩 받아 들고는 길가에 퍼질러 앉아서 맛있게 먹었다. 우리 부부는 추억을 먹었을 테고, 도시락의 추억이 없는 급식 세대인 아이들은 시장을 먹었을 것이다.

     

보리밥과 단무지 몇 조각의 반찬일 망정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기억되던 도시락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른 새벽부터 물을 긷고 장작을 피워 가마솥에서 지은 따스한 밥과 함께, 어머니의 정성과 기대도 그 도시락 한 통에 같이 담아졌을 것이다. 한 주걱 한 주걱 밥을 담을 때마다 자식이 먹고 잘 커나가라는 염원을 담으셨을 것이다. 아버지만 드시도록 가마솥 한쪽에 한 줌 앉힌 쌀밥에서 쌀알을 골리듯이 조금 떼어내어 아들의 도시락으로 밥을 담으시면서 속으로 조금의 갈등도 하셨을게다.

     

어머니께서 자식들에게 싸 주신 도시락은 몇 개나 될까. 초등고학년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9년, 일 년에 대충 잡아도 백오십~백팔십 개이니, 적게 잡아도 내게만 천오~육백 개의 도시락을 싸 주신 것이고 형제들 것까지 하면 얼추 만 개의 도시락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만 개의 도시락. 그것을 쌓는다면 마천루 빌딩의 높이는 족히 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해보니 가난한 삶에서 날마다 서너 개의 도시락을 싸면서 자식들의 찬란한 성공을 기원했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한 회한이 가슴저미게 사무친다.

      

그 노랗고 납작한 양은 도시락통이 그리워, 언젠가 황학동 시장에 갔을 때 어렵게 하나를 산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레트로 열풍에 따라 몇천 원 가격으로 인터넷에서 많이 팔고 있다. 도시락의 추억이 없는 딸아이도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맛있는 반찬은 밥 밑에 숨겨 갔다며’하고 아는 체를 하며 도시락에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결국 일주일도 못 가서 도시락은 다시 포장되어 찬장 한구석에 처박혀있다.

      

밥과 반찬으로만 도시락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도시락에는 어머니의 희생과 눈물이 함께 담겨 있었기에 만 개의 도시락이 되어 자식들의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아있는 것이다. 갈탄 난로에 데워지던 따끈한 도시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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