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원세상 Jan 18. 2022

葛 藤 (갈등) _ Entanglement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이지만 초가집 지붕 위로 삐죽 솟아 있는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면 하루가 시작됩니다. 새벽 가마솥단지에 물을 길어 붓고 밥솥에서는 밥이 익고 옹솥에서는 국이 끓지요.      


아궁이로 불을 지피면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 거리며 올라가는데, 굴뚝이 연기를 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멀리서 집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면 엄마가 있다는 안도감에 한걸음에 달려 간 기억도 있습니다. 연기가 나지 않는 굴뚝이란 어쨌건 적막한 것이지요.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슨 연기를 토해 내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싱싱하게 살아있다는 감동을 누릴 수 있는 일인지요.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있어도 무엇인가를 긁적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내 존재 조차가 불안합니다. 다만 연기처럼 지워지지 않고 흔적을 남긴다는 일이 오히려 그 불안감을 더 조성할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완전연소란 없을까요. 연기까지 태워버릴 수 있는 그런 완전함. 무엇인가 쓴다는 것도 자기 연소의 한 방법일 수 있지만 무엇인가 쓴다는 일이 자기 고백임에 틀림없고 그것을 또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면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연소도 불가능할뿐더러 완전한 표현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꾸물거리는 연기란 살아있다는 증거일 수는 있어도 삶 그 자체의 욕구이지 그 욕구의 승화는 못 되는 것이 연기는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고 있는 불에도 부채질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번 꺼진 불은 다시 불붙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을음이 나지 않는 완전한 불길을 내기 위해서 재를 치우고 불씨를 다시 살려내야 하는 수고로움은 기름을 다시 부어서라도 다시 활활 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나는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기 위해 나는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제대로 타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활활 타오르기 위해 많은 행동으로 옮기지만 행동이 절망을 낳는다면 그 절망은 다시 행동의 동기가 될 것입니다. 곰팡이와 꽃의 차이를 모르는 두꺼운 위선과 기만, 비겁 속에서 주먹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고 언제나 다시 새로워지려는 정신, 그리고 그러한 정신이 요구하는 형식은 바로 생의 法일뿐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 대신 나의 의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칼을 사랑한다는 말처럼 위험합니다. 칼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칼이 날아가 박히는 대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항상 새파랗게 갈고닦아 녹슬지 않는 검으로 간직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나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비어있는 항아리에 새로운 물을 붓는 이 느낌. 이 순간이야 말로 어느 것도 나를 건드리지 못할 고요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뜨러 가는 여인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물을 길어 붓는 여인의 가슴에 차오르는 은밀한 기쁨을 함께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요. 하루하루가 일생처럼 아름답고, 아름답기 위해서 의지의 칼날이 되길 그런 시간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자질은 통솔력과 카리스마뿐 아니라 그만한 역량과 품위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자질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유롭고 민주적인 대표 밑에서는 직원들도 여유롭고 민주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인성이라는 것은 자연스레 아래로 흐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고 거꾸로 물을 역류시킬 수 없듯이 흐르는 사람의 마음 역시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윗사람의 자잘한 감성들을 아랫사람이 본받고 따라 하고 본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쉽게 감정 표시하고 쉬이 화내는 일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대장의 역할이며 대장의 몫인 것입니다. 선장이 키를 잘못 쥐면 배는 좌초하고 맙니다. 선장이 평소에 아랫사람 단속을 제대로 못한다면 반란이 일 수 있고 위계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입니다. 그럼 그 배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 좌초되면 어때, 또 하나 사면되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좌초된 순간은 이미 모든 게 끝난 것이고 다시 수습하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출혈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인생이 늙어버리는 것입니다. 그전에 단속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긴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지금이라도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전진해야겠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바로 서야만 주위도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갈등이란 말 그대로 칡 갈(葛) 자에 등나무 등(藤) 자를 씁니다. 영어로는 Entanglement라는 말이 어울릴 듯싶지만, 칡과 등나무가 얽히듯이 까다롭게 뒤엉켜 있는 상태, 즉 일이나 인간관계가 까다롭게 뒤얽혀 풀기 어려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혹은 개인의 정신 내부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이 벌이는 충돌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입니다. 가뜩이나 얽기고 꼬이기 좋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칡과 등나무 둘이 만났으니 어지러울 것은 눈앞의 불을 보듯 훤한 일입니다.      


그동안 사람 관계에서도 두 엉켜 자라는 나무가 만난 것처럼 일상을 채웠다면 이제는 화해와 단합의 무드로써 풀어나갈 때입니다. 한꺼번에 풀기 힘이 든다면 차근차근 천천히 풀어 나가야지요. 성급한 우리들은 또 새로운 것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다려주는 마음이야 말로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또다시 시작되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