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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세상 Nov 07. 2022

바리깡 추억

유년기 시절 딱히 미용실도 드문 시절에 우리 집엔 이발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리깡이라고 하는 기계였는데, 어머니나 아버지, 누구든 먼저 잡으시면 요술 같은 머리를 만들어 내는 이발기는 동네 사람들을 집으로 다 불러들이는 역할도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지요.      


아버지는 군대 시절 이발사로 계셨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성능 좋은 일제 바리깡을 하나 얻게 되었고 그 덕에 동네 노인들은 공짜로 머리를 자르는 행운을 자주 누렸지만 우리 형제들은 억지 춘향 격으로 끌려가듯 의자에 앉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때 유행하던 머리는 일명 상고머리.

앞머리는 요즘 유행하는 뱅 스타일로 가지런히 자르고 뒷머리는 위로 바짝 쳐올린 다음 마무리를 바리깡으로 합니다. 그런데 그 바리깡이란 것이 수동인지라 무지하게 씹힙니다. 아버지는 사정없이 고개를 눌러 버리고 떨어뜨려진 고개로 사정없이 통증이 밀려옵니다. 머리카락이 다 뽑히는 그 느낌,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은색을 띈 그 무식하게 생긴 놈은 단지 양손의 아구 힘만으로 쥐었다 놓았다를 해 주면 머리카락을 잘라냅니다. 성격이 급하신 아버지는 쥐었던 손이 다 풀어지기도 전에 손은 앞으로 전진, 머리카락은 그래서 다 뽑히고 맙니다. 으앙 하고 울고 말 것도 없이 눈물 몇 방울 떨구고 나면 뚝딱 내 머리는 시원스레 깎여져 있고 아버지는 바리깡을 곱게 닦아 융에 다시 쌓아 두셨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예쁘게 커트도 하고 양갈래로 리본을 묶고 다녔지만, 우리 집 오 형제는 긴 머리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치 취미생활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요일만 되면  오 형제를 차례대로 의자에 앉혀 한결같은 스타일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리셨지요. 여권사진 찍는 것도 아닌데 귀가 반듯하게 보여야 하고 뒤통수는 반짝거릴 만큼 가지런히 밀어서 쳐올린 스타일이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무조건적인 그 머리는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비로소 중학교에 입학해 단발로 기르고 머리핀을 꽂게 될 때까지.     


그런 아름답고도 눈물 나는 추억을 가지고 있는 이발기가 요즘은 미용실에 가면 클리퍼라는 성능 좋은 이발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씹힌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다지만 유난히 목덜미에 잔머리가 많이 나는 나로서는 머리를 자른 뒤 바리깡으로 마무리를 해 주지 않으면 대책이 없습니다.      


바리깡만으로 성이 안찬 아버지는 보기만 해도 서슬이 퍼런 면도칼을 소가죽 끈에 노련한 솜씨로 쓱싹 갈아 어김없이 목덜미를 더 야무지게 밀어 버리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께 반항 한번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아버지가 잘라주는 대로 있었던 내가 지금 생각해보니 어지간히 착했던 것은 아닌가 하지만, 나뿐 아니라 위로 언니 셋도 주르륵 같은 스타일이다 보니 어쩐지 나만 다른 스타일로 하면 소외될 것 같은 감정도 있지 않았나 합니다.      


이제 추억의 한 장입니다. 아버지는 먼 길을 홀로 떠나셨고, 엄마는 치매로 요양원으로 가셨고. 나는 추억을 곱씹으며 이렇게 부모님을 그리워합니다.      


바리깡은 많은 사람들이 일본 말인 줄 잘못 알고 있는데,  바리깡은 사실 프랑스 말입니다. 바리깡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프랑스의 바리깡 마르(Bariquand et Mare)라고 하는 회사의 제품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 회사명이 통칭화 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밴드의 통칭인 대일밴드처럼 하나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바리깡은 큰언니가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고, 나는 그저 앨범 속 상고머리를 한 나를 보며 옛시간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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