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쌈

하루를 감싸 안는 한입의 위로

by 나미

장마다.
비가 아침부터 끊임없이 내리고, 하루 종일 끈적끈적 후덥지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점점 더 동남아처럼 날씨가 변해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습하고 30도를 훌쩍 넘는 더위는, 베트남에서 경험했던 그것과 비슷해지고 있었다.


“기운이 없어. 으으 축축 처지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

모처럼의 휴일인데, 비라니.
왠지 하늘이 원망스러워지고, 무기력하게 방에서만 굴러다니던 나는 볼멘 소리를 내뱉었다.

에어컨을 틀면 왠지 추워서, 선풍기만 열심히 방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건, 창밖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는 것.
비 오는 날은 먼지도 가라앉는 것처럼, 내 안에 쌓여 있던 조용한 불편함들도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었는데, 우리 밖에 나갈까?”

리키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이런 날엔 또 빠질 수 없는 음식이 있다.

바로 막걸리다.
뽀얀 빛깔의 막걸리, 센 술을 좋아하지 않는 리키도 막걸리는 입에 맞는지 유독 좋아했다.
보통은 막걸리에 전이 정석이지만, 오늘은 왠지 다른 조합이 떠올랐다.




“리키야, 보쌈 먹어본 적 있어?”
“아니, 보쌈? 삼겹살 같은 거야?”
“아니야. 보쌈은 보쌈이고, 삼겹살은 삼겹살이야.”

아리송한 설명을 덧붙이며 나는 자신 있게 보쌈집으로 리키를 안내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빗방울이 요란하게 차창 밖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차를 몰았다. 몸도 마음도 고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날이었다.




“우와아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리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삶겨진 고기와 갖은 쌈채소, 부추무침, 된장, 쌈장, 쟁반막국수까지—말 그대로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한 상이 펼쳐졌다.

“보쌈이 이거구나! 삼겹살이랑 비슷한데… 다르네.”
“그렇지? 리키야, 잘 봐!”

나는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보쌈 한 점을 집어 쌈채소 위에 얹었다.
그 위에 생마늘 한 조각, 부추무침을 조금 얹고, 마지막에 쌈장을 올려 조심스럽게 접었다.
“이렇게 주머니처럼 싸서 한 입에 넣는 거야. 잘 봐! 와앙.”

내가 입을 한껏 벌려 쌈을 넣는 모습을 리키가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곧 그도 따라 쌈채소 위에 고기를 올리고, 이것저것 얹어 자신의 첫 보쌈 쌈을 만들었다.
입에 넣고 한참을 씹던 리키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맛있다!”

처음 내뱉은 말은, 말보다 탄성에 가까웠다.
나는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리키의 입가를 바라봤다.

평소처럼 큰 제스처도 없이 조용히 오물오물 씹는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야들야들하네. 그리고 이 소스… 뭐라고 해야 하지, 짭짤한데 감칠맛이 있어.”

리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쌈장과 된장을 번갈아 찍어보더니, 연달아 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부추무침을 넣고, 다음엔 깻잎을 두 장 겹쳐서 쌈을 만들었다.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귀여워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났다.


“보쌈 좋아하네, 너.”
“응, 완전 좋아! 삼겹살보다 편안한 맛이야.”
“편안한 맛?”
“응. 삼겹살은 좀 파티 같고, 이건... 뭔가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느낌?”


그 말에 나는 잠시 젓가락질을 멈췄다.
리키의 어머니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요리하시는지 알기에,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울렸다. 다른 문화인데도, 같은 따뜻함이 있다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에서 귓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후덥지근했던 하루는 어느새 잊혔고, 따뜻한 국물과 푹 삶은 고기의 온기 속에서 마음이 노곤해졌다.
바깥은 여전히 꿉꿉한데, 우리 식탁만은 맑은 오후처럼 환하고 포근했다.

나는 고기 한 점을 다시 집으며, 말했다.

“보쌈은 말이야, 그냥 고기 먹는 게 아니고... 마음을 감싸서 먹는 거야.”
“마음을 감싸서?”
“응. 보쌈이라는 말 자체가 감싸는 거잖아. 쌈을 싸는 것도 그렇고, 뭔가 속이 편안해지는 음식이야.”


리키는 그 말을 곱씹는 듯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쌈을 만들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마음까지 잘 싸서 먹은 날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날이었다.
비가 와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날, 아무 기대 없이 나섰던 외출,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따뜻했던 식사.

누군가와 함께 보쌈을 먹는다는 건, 그런 하루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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