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음식

서툰 세배와 세뱃돈, 외국인 사위의 따뜻한 설날

by 나미

쌀쌀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호호 불어 나왔고, 길가에는 덜 녹은 눈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긴 겨울의 끝자락,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음력설. 춥지만 쨍쨍한 햇살이 군데군데를 비추며, 하루를 조금은 설레게 하고 있었다.




차 안 히터가 켜져 있었지만, 우리는 둘 다 조금 긴장한 표정이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리키를 슬쩍 바라보았다.


“리키야, 설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음… 구정이라고 들어봤어. 한국에선 큰 명절이라고 했지?”
“맞아. 설은 음력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야. 가족들이 모여서 음식을 만들고, 새해를 축하해. 떡국도 먹고.”
“떡국?”
“응,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해. 조금 재밌지?”

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약간 크리스마스 같기도 한데, 한국적인 느낌인가 봐.”
“응,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 오늘 가면 바로 느낄 수 있을 거야.”


창밖에는 햇빛이 눈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긴장한 리키의 손등을 가볍게 잡았다.

“잘할 거야. 그냥 자연스럽게 인사하면 돼.”

리키는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어,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어서 와.”


익숙한 목소리와 따뜻한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들, 사촌들… 외갓집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리키는 활짝 웃으며 첫인사를 건넸고, 나는 그의 손끝을 살짝 쥐며 안도했다.

이미 부엌과 거실은 명절 음식의 향기로 가득했다.
전, 빈대떡, 잡채, 떡국, 육전… 기름 냄새와 간장 향이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할머니의 자랑, 우리 집만의 특별한 음식이 있었다.

바로 특제 국수.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육수를 한데 모아 간장과 양념으로 간을 하고, 시원한 오이와 닭고기, 계란 고명을 올린 국수였다.


명절마다 빠지지 않고 상에 오르던 이 국수는, 기름진 음식들 사이에서 입맛을 환하게 살려주었다.
나는 국수를 앞에 두고 리키에게 말했다.


“리키야, 이 국수는 국물이 진짜야.”


시범 삼아 국물부터 한 숟갈 떠 넣었다.
시원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면발을 후루룩 한 입 먹자, 쫄깃한 식감이 목을 시원하게 타고 내려갔다.
기름진 전과 육전을 먹은 후라 더더욱 깔끔하고 개운했다.


“이렇게 먹으면 돼. 국물 한입, 전을 올려서 면도 한입.”

나는 전을 올려 함께 먹으며 리키를 바라봤다.
리키는 이미 무아지경에 빠진 듯했다.

국수 위에 빈대떡을 올리고, 이번에는 부추전과 함께 한 입, 고명까지 야무지게 얹어 한 입.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는 나보다도 더 우리 가족의 국수를 잘 즐기는 사람이었다.

리키가 국물까지 시원하게 들이켜자, 삼촌들과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웃음소리에 식탁 위 공기가 더 부드럽게 풀어졌다.

리키가 내 가족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집에서 여러 번 연습했던 세배였지만, 막상 가족들 앞에 서니 리키는 잠깐 멈칫했다.
나를 곁눈질로 힐끗 보며 동작을 따라 했다.
어색했지만 성심껏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묘하게 귀엽고 다정했다.


“그래, 우리 손녀딸 잘 부탁해요.”


할머니가 인자한 얼굴로 세뱃돈 봉투를 건네셨다.

리키는 두 눈이 동그래진 채 나를 쳐다봤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해?”

리키에게 가족들로부터 용돈을 받는 건 익숙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히 받으면 돼. 나중에 인사드리면 더 좋아.”


리키는 이내 고개를 숙여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리키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셨다.




그날, 설 명절의 온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낯선 문화였지만, 서로의 다름을 배우고 스며들던 순간들.

그리고 따뜻한 국물처럼 우리를 감싸 안아주던 가족의 눈빛.


그것이 설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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