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숟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행복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밝은 웃음으로 회원님을 배웅하고 나면, 남는 건 기분 좋은 피곤함과 노곤한 다리였다. 마지막 타임까지 온 힘을 다해 회원님과 운동을 하고 나면, 가끔은 퇴근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데 리키가 한국에 오고 나서는 조금 달라졌다.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집에 가서 얼른 리키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는 건, 생각보다 더 좋은 기분이었다.
“리키야, 나 왔어!”
그러나 오늘따라 현관이 조용했다.
평소라면 문소리만 들어도 겅중겅중 뛰어나와 반겨주던 리키가, 오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살짝 불안한 마음으로 거실을 들여다보니, 리키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소파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아니, 리키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나 집에만 있으니까 좀 우울해.”
이불속에서 나온 리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일하는 동안 리키는 주로 집이나 헬스장에만 있었다.
하루 8시간을 혼자 보내는 그의 기분도 이해가 됐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을 쉬는 날 조금 더 리키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녔어야 했는데…
“내일 나 출근하기 전에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맛있는 거? 어떤 거?”
리키의 큰 눈동자가 반짝였다. 가끔 그 눈을 보고 있으면, 그 안에 작은 우주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리키야, 부대찌개 안 먹어봤지? 너 분명 좋아할 거야.”
출근 전, 짬을 내어 리키와 찾은 부대찌개 집은 한국의 오래된 골목길을 몇 번이나 돌아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하에는 노래방, 1층에는 카페, 그리고 2층에 자리한 부대찌개집.
계단을 오르며 리키는 건물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와…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도 멋있다. 한국 느낌 물씬 나.”
나에겐 그저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었지만, 리키에게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보였던 것 같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사장님의 우렁찬 목소리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침착하게 “두 명이요.”라고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밑반찬은 셀프. 김치, 콩나물, 단무지까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주방 이모님들의 분주한 손놀림, 사장님의 활기찬 동선까지… 공간에 활기가 가득했다.
점심시간이 아님에도 가게 안에는 이미 손님들로 북적였다.
몇몇은 유니폼 차림의 병원 직원들 같았고, 몇몇은 공사장에서 막 점심을 맞이한 듯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왠지, 느낌 좋다. 잘 찾아온 것 같아.”
리키도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부대찌개 나왔습니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냄비는 빨간 국물이 보글보글 끓으며 허기를 자극했다.
스푼을 넣자마자 퍼지는 매콤한 고춧가루 향, 김치와 햄이 뒤섞인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게… 부대찌개야? 햄이랑 소시지가 들어있네!?”
“웅. 부대찌개의 부대는 army를 뜻해. 예전에 한국이 많이 못살았을 때, 미군 부대 근처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래.”
“역사가 있는 음식이구나.”
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국물을 떠 한 모금 마셨다.
“헉… 이건 내가 상상한 맛이 아닌데! 와… 이거 국물 미쳤다.”
그는 놀란 얼굴로 연신 숟가락을 움직였다.
점점 미소가 번지더니, 밥에 국물과 햄, 소시지, 김치를 수북이 올려 비벼 한입 가득 넣었다.
밥알 위로 스며든 빨간 국물이 입안에서 퍼지고, 부드러운 햄과 매콤한 김치가 어우러져 묵직한 한입의 위로가 되었다.
“맛있어요? 굿?”
인상 좋은 사장님까지 다가오셔서 말을 거셨다.
외국인인 리키가 부대찌개를 맛있게 먹는 모습이 신기하셨는지, 인심 좋게 밥을 한 공기 더 권하셨다.
우린 웃으며 공깃밥을 추가했고, 리키는 금세 새 밥에도 국물을 가득 비벼 먹었다.
행복해하는 리키의 얼굴을 바라보자,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과 기분 좋은 포만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우리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 시간을 행복으로 채우는 건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하루.
그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