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내려갈 준비를 하던 때.
"여보. 우리 캠핑 장비도 다 가져가자. 제주도 가서 캠핑 실컷 해야지."
아내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웃음으로 바뀌었다. 싣고 갈 짐은 많은데 캠핑 장비까지 생각하니 답답했는데 같이 경치 좋은 곳에서 캠핑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뀌었나 보다.
"당연히 가져가야지."
시아가 역시나 옆에서 내 편을 들어준다.
캠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다. 20대 때부터 시작한 것이 아직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남아있다. 군 제대 후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순간을 만들어 보고자 시작한 호주 자전거여행 때 캠핑을 시작으로, 끈질긴 설득 끝에 아내와 함께한 서울에서 춘천까지의 자전거 여행 중 캠핑, 배를 타고 섬에서 하룻밤을 보낸 친한 형과의 백패킹, 나와 아내를 소개해준 친구가족과의 캠핑 등 많은 추억들이 캠핑과 함께 쌓여가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 친한 형과의 백패킹 중에 아버지와 중학생 딸이 같이 백패킹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정말 뭔가 번쩍했다.
'그래 나도 시아가 크면 같이 백패킹 해야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그 모습이었다. 딸과의 백패킹이라.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드디어 그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도 제주도에서.
아내가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게 됐다. 아직 가게를 시작하지 않았던 시기라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었다. 1박 2일을 시아와 무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캠핑이 생각났다. 처음으로 시아와 단둘이 캠핑을 하게 된 것이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중에 서귀포 자연휴양림 캠핑장이 눈에 들어왔다. 편백나무 숲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캠핑할 수 있는 곳. 요금도 시에서 운영하는 곳이어서 저렴했다. 하지만 문제는 주차장에서 캠핑 사이트까지 꽤 걸어야 한다는 것.
'내가 짐을 다 들고 가야 하는데... 시아는 인형만 가져갈 텐데...'
제주도 내려갈 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친구. 바로 백패킹 가방이었다. 시아 키만 한 배낭에 코펠, 침낭, 텐트 등 혼자 캠핑하는데 필요한 장비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이 정도면 시아와 단둘이 캠핑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시아랑 함께하다 보니 배낭 외 많은 것들이 더 필요했다.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남아 있는 양손에는 한가득 짐이 무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들떠있는 시아와 함께 차를 타고 캠핑장으로 가는 길.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제야 하게 되다니. 시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뿌듯하기도 했다. 괜히 어린 시아가 힘들어할 거라는 막연한 걱정 때문에 주저해 왔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실행에 옮긴 건 너무 잘한 일이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를 때다'
지금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 마디. 시아의 웃음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캠핑장에 도착해 입구에서 예약 확인을 할 때였다. 직원이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랑 둘이 캠핑하는 거니? 멋있다."
시아는 신나는 목소리로
"예, 너무 좋아요. 기대돼요."
약간은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옆에 서있던 나는 가만히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남들이 잘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뿌듯함?
아빠와 딸이 너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직원분은 캠핑장 이용방법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차를 타고 숲 길을 올라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시아와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촘촘히 자라고 있는 나무들, 숲 속 향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이 포근한 느낌과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시아도 같은 느낌이었을까?
갑자기 부스럭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낙엽사이로 긴 물체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어린 뱀. 놀랠 줄 알았던 시아가 귀엽다며 뱀을 멀리서 쳐다봤다. 자연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책에서만, 동물원에서만 보아오던 동물을 숲 속에서 자연스레 볼 수 있는 시간. 시아에게 가장 좋은 수업이 아닐까.
주차장에서 캠핑 사이트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천천히 숲 길을 걸으며 맑은 공기도 마시고, 시아와 춤도 추고, 사진도 찍고.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캠핑 사이트는 사진에서 보던 데로 편백나무 숲 가운데 제법 넓게 만들어져 있었다. 시아에게 우리 번호가 적혀있는 데크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찾기가 힘들었던지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안쪽 끝에 우리 자리가 있었는데 번호가 잘 안 보였나 보다.
의자를 펴서 시아를 앉혀놓고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텐트를 쳤지만 이번 만은 느낌이 달랐다. 그냥 놀러 온 것이 아니라 무언가 배우러 온 듯한 느낌. 시아에게 가르치기만 했던 나에게 이 순간은 시아에게 배우는 느낌이 들었다. 시아가 원했던 것은 예쁜 옷,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지금처럼 아빠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이 아닌 마음으로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담하고 포근한 보금자리가 완성되니 배가 고파졌다. 이전 캠핑처럼 숯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는 건 아니었지만 스팸에 김치와 밥 만으로도 행복한 저녁시간이었다. 조금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갓 구워진 스팸 한 조각과 따뜻한 햇반. 미슐렝 요리사가 해주는 음식보다 이런 저녁이 더 좋다.
"세상에서 아빠가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어."
시아가 입안 가득히 밥을 넣고 웅얼웅얼한 말이었다. 이런 말 들을 수 있는 시간.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어둑해진 숲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수다 밖에 없었다. 밖에서 뛰어놀 수도 없고, 시끄럽게 떠들 수도 없었다. 밤이 되니 숲 속은 더욱더 고요했다. 조용한 소리로 시아와 오늘 있었던 일, 제주도 생활, 앞으로 어떻게 지냈으면 좋을지 등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동안 점점 밤은 깊어만 갔다.
나의 팔을 베고 자는 시아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미소를 짓는다. 힘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와 함께 해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시아와 함께하는 일분일초가 너무 소중하고 행복했다.
'계속 이런 시간들만 있었으면.' 이런 꿈을 꾸며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까악 까악~
까마귀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제주도에 까마귀가 많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여기 오기 전에 블로그에서 귀마개를 챙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시아도 더 자고 싶은데 까마귀 울음소리에 못 자니 찡찡대고 투덜거렸다. 그 모습도 얼마나 귀엽던지. 일어나기 싫어 둘이 꼭 껴안고 투덜투덜 거리며 해가 더 뜨길 기다렸다.
따스한 햇살이 텐트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일어났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아침을 준비했다. 시아가 좋아하는 라면에 참치 그리고 따끈한 밥. 일어나지 않는 시아에게 "라면 먹자"하면 벌떡 일어난다. 길거리 지나다닐 때도 라면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우리 딸. 아내는 먹이지 말라고 하지만 맛있는 걸 어쩌나. 나도 좋아하고 시아도 좋아하니.
눈꼽도 떼지 않은 채로 의자에 앉아 라면 끓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만 한다. 라면이 더 좋은가보다.
밥 위에 라면을 올리고 참치와 비벼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이 나온다. 매워도 헥헥되며 먹는 모습이 웃겼지만, 잘 먹기만 한다면 뭐가 문제인가. 잘 먹는 게 최고다.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또 달라고 한다. 이럴 때는 평소의 2배는 먹는 것 같다.
즐거운 식사시간이 끝나고 집에 가야 할 시간. 특별히 한 일은 없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시간. 텐트를 접고 짐을 챙기면서도 꼭 다시 올 생각 밖에 없었다. 다음번엔 꼭 엄마랑 같이 오자고 시아에게 약속했다.
제주도에 오기 전에도 시아와 단둘이 있었던 시간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1박 2일로 캠핑한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셋이서 했던 캠핑이었기에 이번 캠핑은 시아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다양한 경험을 쌓게 도와주는 것. 내가 시아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시아도 많은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아빠가 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함께 있고 싶은지를.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갈 때 시아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아빠 최고, 아빠 진짜 사랑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