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그냥 행복발작 버튼이다.
나에게 남아 있는 건강마저 곧 사라지겠다는 불안감에 늙으면 돈을 쥐어줘도 못 논다고, 그나마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 다녀와야만 했다.
미국에 있는 친구와 각자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만나 거기서부터 그 주위 세 나라를 자유롭게 돌기로 했었다. 구글에 ‘유럽 자유여행’만 쳐도 정보가 한 다발인데… 하면서 여유를 부려봤지만 막상 동선과 시간, 교통을 맞추려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결국 우리는 압도적이지 못할 바엔 차라리 관습적인 게 낫다며 패키지로 '진행시켜!' 하고 방향을 틀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아부다비를 경유하고 파리 공항에서 패키지 여행팀에 합류하는 일정이었다.
가는 동안 나는 급체 + 공황 + 두통 = 삼단콤보로 어찌나 고생했던지 온 김에 죽을 힘을 다해 싸그리 보고 가리라 다짐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파리공항에서 친구와 상봉했다. 하지만, 반가움에 얼싸안을 틈도 없었다. 저쪽에서 패키지 여행 동행자들이 깃발을 들고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양쪽에서 긴 줄을 돌리면 타이밍을 보다가 하나씩 재빨리 뛰어드는 줄넘기처럼, 우리는 그렇게 조속하고 긴박하게 그 무리에 합류했다.
진정한 파리지앵은 자유가 좋다고 하지만... 나는 아마도 구속을 좋아했었나 보다. 투어가이드의 인솔은 딱 내 스타일이었다.
우리는 가이드를 영혼 없는 좀비마냥 집요하게 따라다녔고, 가이드는 미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깃발을 휘날리며 쌍코피 터지게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호텔 조식을 풍족하게 먹고 관광버스에 올라타면 가이드는 마이크를 잡고 가는 길 내내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차 안의 시간조차 허투루 쓰지 않는다. 창밖으로는 낯선 풍경이 흘러가고 귀로는 오래된 도시의 이야기가 들어온다.
관광과 이동을 쉼 없이 이어가며 도저히 하루에 담기 힘든 일정들을 마법처럼 하루 안에 욱여넣었다.
과연 두세 나라를 2~3일에 보는 것이 가능할까? 쌉가능! 이라고 대답해 주시는 가이드는 어떤 축지법인가 싶었는데, 그 비현실적인 루트를 따라다니다 보니 노약자는 피하는 게 좋을 듯하다. 우리가 지나가는 풍경들은 마치 영화 장면을 2배속으로 돌리는 것처럼 빠르게 바뀌어 갔다.
한국식 패키지 여행은 짧지만 굵은 내 몸매처럼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치는 행군이었다. 이것은 여행일까, 훈련일까.
그리고 밤이 되면 친구와 나는 녹초가 되어 쓰러질 만도 하지만, 종일 찍었던 사진을 눈이 벌개질 때까지 보며 즐거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부터인가 관광버스 안에는 수면가스가 살포되어 그만 렘수면에 빠져 눈동자가 오르락내리락,.. 앞에 마이크 잡으신 가이드님... 지금이나마... 흉한 못 볼 꼴 보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사과 드리고 싶어진다.
유럽을 갔음에도 유럽 사람보다 한국인들을 더 많이 봤다는 아이러니를 안고 대장정 같은 2주, 4개국 유럽 여행이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여행 후유증으로 한 달을 무기력증으로 헤맸다.
이 저질 체력으로 유럽을 다녀온 것은 지금 생각해도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그 여행은 여러 의미에서 ‘압축된 시간’이었다. 누군가 추천한 가성비 갑 서유럽 실속 패키지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몸의 한계도, 여행의 방식도, 그리고 그 안에서 두려움을 용기로, 용기를 다시 도전으로 바꾸어 가던 시간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시간도 아니다. 결국 여행을 끝까지 완성시키는 건 건강이다. 건강이 있어야 감동도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