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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Aug 12. 2023

08 신문배달과 가불인생

외판원을 그만두고 다시 일할 곳을 찾아봤다.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 신문 배달이었다. 이번에는 도봉구 쌍문동으로 갔다. 나는 00일보, 친구 2명은 00일보 보급소에 둥지를 틀었다. 배달하는 사람을 속된 말로 ’딸배‘라고 불렀다. 참으로 듣기 거북했다. 한 달 수당은 2만 원에서 4만 원 정도였는데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배달하면서 대학입시를 위해 서울역 부근에 있는 대일학원에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한 친구는 새벽에 배달 후 낮에는 라디오 부품 제조 공장을 다녔다.      


밤에 일하고 낮에 공부하는-야경주독-생활이 시작되었다. 잠을 재워준다고 했지만 자그마한 방에 딸배 5-6명이 자야 할 정도로 비좁았다. 조간신문이서 배달을 위해서는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야 했다. 일찍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남들 다 자는 고요한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일어나자마자 3-4종 되는 광고지를 신문 사이에 끼워 넣는 작업이 먼저였다. 광고지는 보급소장에게는 순수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장이나 총무는 수시로 광고지 유치 영업을 했다. 당시에 아파트나 빌라 분양 광고지가 많았는데 그런 종류가 신문의 무게를 배가시켰다. 광고지가 많이 들어가 보급소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필 때마다, 딸배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배달할 구역에 대하여 전임자로부터 인수를 받아야 했는데 종이를 길게 접어 첫 번째 집부터 200번째 마지막 집까지 일일이 배달 지도를 만들었다. ‘좌회전해서 세 번째 감나무 있는 집, 왼쪽으로 꺾어 2층 집’이런 식으로 메모를 했다. 그리고 눈에 익숙해지도록 하루 종일 그 지도를 보고 몇 바퀴를 돌았다.

첫날 광고지가 잔뜩 끼워진 신문 200부를 어깨에 메고 전임자 뒤를 쫓아갔다. 전임자는 나한테서 신문을 받아 두 번 접은 후 능숙하게 던져 넣으며 시범을 보여줬다. 순식간에 접어진 신문이 바람처럼 대문과 대문 천정 틈 사이로 들어갔다. 내 차례다. 접는 것도, 던지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웠다. 세상에 처음부터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하루, 이틀 접고 던지고를 반복하니 차츰 성공 빈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반복, 모방의 힘은 무서웠다. 나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든지 포기하지 않고 반복하면 '할 수 있다'라고 믿었다. 그것이 창조의 영역이 아니라면. 100미터 달리 듯하며 2층, 3층까지도 던져 넣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식은 죽 먹기였다.   

   

딸배 일에 적응이 되었다. 200부를 2시간 만에 모두 돌리고 나니 5시. 시간에 여유가 생기자 한 구역을 더 신청했다. 3시부터 7시까지 마라톤 하듯 500부를 돌리고 나면 파김치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신문이 안 들어왔다는 전화. 비에 젖었다는 전화, 신문 끊는다고 한 달 전부터 말했는데 계속 넣느냐는 전화(속칭 ‘깡치’라고 불렀다)까지. 그런 전화가 오면 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당에서 공제할 테니 잘하라는 반 협박소리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신문 하나를 다시 가져다주는데 30분이 넘게 걸린 때도 있었다. 그야말로 쥐꼬리만 한 수당 때문에 나는 매월 가불을 해야만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불인생이 되었다. 두 구역을 배달해도 교통비에 학원비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아침을 먹고 졸린 눈을 비비며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서울역 근처의 학원. 중간에 졸아 몇 정거장을 더 간 적도 많았다. 쩌렁쩌렁한 영어 선생님의 목소리도 내게는 부드러운 자장가로 들렸다. 수업이 시작되기 무섭게 졸기 일쑤였고, 때로 코를 골기도 했다.       

  

어느 날 배달을 마치고 쌍문역 계단을 막 빠져나오는데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아저씨 한 분이 100원을 내밀며 신문 한 부를 달라고 했다. 처음으로 수당 외 수입이 생겼다. 그 100원이 얼마나 커 보였더니 계단을 내려가는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몇 번이나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걷는데 눈물이 났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그 말이 뼈에 사무쳤다.      

이 순간을 평생 마음속에 간직하고 우물을 나와 세상에 용기 있게 맞서는 개구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다음에 성공해서 나 같은 딸배를 보면 신문 한부를 1,000원에 사줘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처음은 미약했고, 지금도 미약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나는 새벽을 달리고 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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